한국SF문학시장에서 듀나가 갖는 사회문화적/지정학적 위치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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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orld Science Fiction Trends" 매거진에 번역 수록될 예정의 글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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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에 위치한 청강문화산업대학교 웹소설창작전공의 교수로 재임 중이며 SF작가로도 활동 중인, 30대 비장애인 시스헤테로기혼 남성 홍석인(필명 홍지운)이다. 그리고 나는 학생들에게 어떤 글을 쓰건 자기소개로 시작하면 글이 순식간에 지루하고 따분해지니 절대로 그렇게 쓰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글을 나에 대한 구구절절한 소개로 시작한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이 글은 한국SF문학시장을 대표하는 작가인 듀나에 대해 소개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그가 가진 사회문화적/지정학적 위치를 설명하기 위해 한국기성문단의 성격과 장르문학시장의 역사에 대한 정리 또한 담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 있어 이 글의 저자인 홍석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어떤 시점에서 이 문제를 보고 있는지, 또한 그에 따르는 한계는 어떤 것인지도 밝혀야만 독자 여러분들이 공정히 판단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이렇게나 지루하고 따분한 도입으로 출발한 것이다.

나의 자기소개에서 독자 여러분들이 읽어내야 하는 정보는 다음과 같다. 이 글은 영어로 공개되겠지만 나는 영어권 화자가 아니고 이 글 또한 번역의 과정을 거칠 것이다. 나는 교수로 근무하고 있지만 학술적 연구자보다는 작법 교육자에 가까우며 교수보다 SF작가로 활동한 경력이 길다. 나는 작가이지만 한국기성문단 외부에 존재하는 한국SF문학시장에 소속되어있다. 나는 서브컬쳐 시장의 종사자이지만 소수자로서의 당사자성은 없다. 부디 이 점을 감안한 다음 나의 글을 읽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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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글을 시작하기 전에 한국기성문단이라는 배경을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한국기성문단의 지향점을 거칠게 설명하자면 "진짜 리얼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 구태여 리얼리즘이라는 개념 앞에 '진짜'라는 단어를 붙여 동어반복을 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한국기성문단이 지향하는 리얼리즘은 학문적으로 구분되는 리얼리즘의 가치를 엄밀히 재현했느냐가 아닌, 발화자가 '진짜'로 규정하는 가치를 얼마나 충실하게 구현했느냐에 따라 정해지기 때문이다.(주석: 여기에서 각 발화자마다 '진짜'로 규정하는 가치는 제각각이며 때로는 동일한 발화자가 '진짜'로 규정하는 가치마저도 그가 쓴 글마다, 심지어 매 문단마다 다르게 정해질 때조차 있다.)

굳이 이 '진짜'라는 가치에서 공통분모를 찾아보자면, 결국 얼마나 생생하게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는 개인의 내면과 감각을 실감나게 전달하느냐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진짜'라는 개념은 실제로 일어난 일을 얼마나 사실과 가깝게 재현하느냐가 아닌,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느껴지도록 만드느냐의 문제에 가깝다. 그리고 고통만큼 실감나는 감각은 없기에 한국기성문단은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는 한 개인이 얼마나 비참하고 끔찍한 일을 겪고 있는지를 묘사하는가에 대해 경쟁하는 장으로 보일 때조차 있었다.

부디 나의 한국기성문단에 대한 이 진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면 한다. 앞서 밝혔듯이 나는 한국기성문단에 속하지 않았으며 속할 생각도 없는 외부자이자 비전문가다. 그러므로 나의 이 진단은 외부자가 내부자들에게 갖는 오만하고 독단적인 편견에 불과할 것이다. 다만 한국기성문단의 역사에서 진정성이라는 가치가 과하도록 빈번하게 호출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진정성이라는 가치가 얼마나 비참하고 처연한가, 얼마나 날 것인가, 얼마나 비린내가 나는가의 정량적인 기준으로 측정되었던 것 역시도 분명하다.

물론 이는 다른 모든 문제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의 역사는 굴곡으로 가득하다.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식민지배가 있었다. 독립운동과 전쟁 그리고 분단이 있었다. 냉전이 있었다. 독재가 있었다. 민주화 운동이 있었다. 탄핵이 있었다.

이렇게 굴곡으로 가득한 세상은 이를 겪은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는 한 개인의 내면과 감각을 그대로 재현하고 모방하기만 하더라도 깊은 사유와 현실적인 실천으로 연결되기 마련이었다. 폭력과 야만을 통한 근대화라는 두 모순된 가치가 충돌하는 한국근현대사에서 '진짜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는 그 자체로 유의미한 기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국기성문단의 이러한 분위기는 SF나 판타지와 같은 장르가 갖는 환상성을 얕잡아보는 풍조로도 이어졌다. 한국기성문단에 속한 사람들은 대부분 SF나 판타지는 '진짜'일 수가 없으므로 제대로 된 문학이 아니라고 여겼다. 또한 그들은 SF나 판타지를 쓰는 작가들을 상업성에 굴복한 '가짜작가'로 취급했다. 실제로 SF나 판타지를 쓰는 작가는 이 장르가 잘 팔려서가 아니라 이 장르를 그저 좋아해서 쓰는, 진정성으로 가득한 작가인 경우가 훨씬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렇게 한국사회에서는 장르문학은 유치하고 통속적인 유희거리(주석: 한상헌, 「SF문학 장의 형성과 팬덤의 문화실천」, 충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2, 102p.)라고 생각하는 것이 평균적인 인식이었다. ‘순문학’을 중심으로 형성된 한국 문단의 비평 및 출판 관행과 SF를 실현 가능성이 없는 허황된 공상쯤으로 치부하는 대중적 인식부족으로 인해 한국 SF 문학은 오랫동안 학술적이고 비평적인 차원과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차원 모두에서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했(주석: 강은교, 「한국 SF와 페미니즘의 동시대적 조우 : 김보영의 「얼마나 닮았는가」와 듀나의 「두 번째 유모」를 중심으로」, 여성문학연구 49호, 2020, 39p.)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짐작할만한 사례가 하나 있다. 오랜 세월동안 한국에서는 SF를 공상과학소설이라고 번역하고는 했다. 한국에서 공상이라는 단어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현실적이지 못하거나 실현될 가망이 없는 것을 막연히 그리어 봄. 또는 그런 생각.' 공상과학소설은 일본에서 SF를 번역하며 사용한 단어를 무비판적으로 한국에서 수용한 것이었으나,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 단어에 다음과 같은 함의가 담기기 시작했다. "진짜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한국기성문단이 SF를 '결코 진짜가 될 수 없는, 허무맹랑한 가짜'에 불과하다고 낙인을 찍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번역어는 오랜 세월동안 한국SF팬덤에게 있어 역린으로 자리 잡았다. 공상이라는 낙인은 한국SF문학시장이 한국기성문단에 편입되지 못하는 장벽으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한국의 많은 SF작가들이 SF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불과하지 않고 보다 깊이 있는 주제의식을 담을 수 있으며, 그렇기에 공상과학소설이 아닌 과학소설로 번역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주장에도 불구하고 아직 많은 지면에서 공상과학소설이라는 번역어가 사용되고 있지만 말이다.(주석: 이러한 논쟁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나는 '공상'이라는 개념에는 긍정적인 의미 또한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는 공상과학소설은 공상소설과 과학소설을 아울러 설명할 수 있으므로 SF를 낮잡아 보기 위해서만 쓰이는 단어가 아니라고도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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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나는 1990년대부터 한국SF문학시장의 대표주자로 활약한 작가다. 듀나는 당시 PC통신 서비스 하이텔의 과학소설동호회에 작품을 올리며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듀나는 당대에 서구 SF문학, 영화 등을 충분히 파악한 상태에서 PC통신 공간의 메커니즘을 능숙하게 활용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작가였다. 익명으로 통신망에 올라온 소설을 읽고 작가를 맞춰야 하는 이벤트에서 ‘이런 글을 쓸 사람은 듀나밖에 없다’는 반응을 얻을 정도로 듀나는 장르적 문법과 매체에 관해 독보적인 장악력을 갖추고 있었다.(주석: 노태훈, 「1990년대 한국소설과 소수성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 2022, 170p)

듀나는 대외적으로 모습을 보이지 않는 익명의 작가라는 점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SNS의 프로필 이미지나 인터뷰에 들어갈 저자 사진을 토끼 혹은 토끼인형의 이미지로 대체하며 그 얼굴을 내보이지 않는다. 듀나가 익명을 고집하는 이유와 그의 정체에 대해서 다양한 가설이 제시되었지만 공식적으로 언급된 바는 없다.

듀나는 한국기성문단에 소속될 의지가 없이 자신만의 탐구를 지속한다는 점에서 신선 같은 작가였다. 또한 한국기성문단이 추구하는 가치를 정면으로 위배하고 구세대적 세계관을 부정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요괴 같은 작가이기도 했다.

 

이렇게 듀나와 관련된 연구를 인용하거나 그에 대한 인상을 적는 것만으로는 그에 대한 설명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하에서는 듀나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작품들을 몇 편 소개하는 것으로 설명을 보충하겠다.

 

<첼로>

로봇이 일상화된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SF러브스토리. 화자 '나'가 이모의 연애 과정을 회상하는 이야기다. 이모는 복지부 주최 노동자 연구회에 참석했다가 트린이라는 작은 몸집의 베트남 여성이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제5번을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진다. 몇 번의 데이트를 거친 뒤 이모는 트린이 로봇이라는 사실을, 두 사람의 연애가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에 의거하여 이뤄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모는 트린이 다른 로봇을 만나는 모습을 보고 질투하거나 식당에서 고령의 백인남자가 10대 중국인 소년의 모습을 한 로봇과 애정행각을 나누는 모습을 보고 자조하며 인간과 로봇이라는 불공정한 관계에서 사랑이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에 빠진다. 로봇 3원칙과 이주민 그리고 퀴어에 이르기까지, 시대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사회문제를 선구자처럼 다룬 듀나의 대표작이다.

 

<스핑크스 아래서>

취미 삼아 IMDB를 둘러보던 화자 '나'는 우연히 '스핑크스 아래서'라는 영화에 대한 페이지를 발견하게 된다. 처음 이 페이지에는 작품의 감독과 주연 그리고 개봉년도 정도의 짤막한 정보밖에 없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촬영감독에서 시놉시스까지 정보가 덧붙여지고, 스탭과 캐스트 또한 최신영화 페이지만큼이나 상세하게 기록되기 시작한다.

'나'는 '스핑크스 아래서' 페이지에 업데이트된 스틸 이미지가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 페이지의 작성자에게 메일을 보내 진상을 추궁한다. '스핑크스 아래서' 페이지의 작성자는 순순히 이 모든 일이 자신의 장난에 불과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장난은 보다 더 큰 사건으로 발전하게 된다. 고전영화광인 듀나다운 장난기로 가득한 작품이다.


<히즈 올 댓>

히말라야 산맥 근방의 소국 출신인 '나'가 천재적 작가였던 큰아버지에 대해 회상하는 이야기다. '나'의 큰아버지는 열세살부터 이웃의 은퇴한 미국대학교수 패리스의 비서 겸 통역사로 지냈다. 큰아버지는 패리스에게 성적으로 착취를 당하면서도 패리스가 갖고 있던 미국의 청춘 드라마 '도슨의 청춘 일기'나 '쉬즈 올 댓' 비디오에 매혹되어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얼마 뒤 패리스가 사망하고 큰아버지는 그의 재산을 모두 물려받게 된다.

큰아버지는 미국 문화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미국의 하이틴 로맨스에 빠져 그리스 작가들이 신화 속 영웅을 주인공으로 삼아 비극을 쓴 것처럼 '도슨의 청춘 일기' 속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드라마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다. 어느 날 큰아버지가 쓴 각본이 헐리웃 제작자에게 전달되고, 헐리웃 영화 시장은 혼종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새로운 천재 작가의 등장에 크게 요동친다. 몇몇 짓궂은 독자들은 이 작품에 등장하는 큰아버지를 한국의 지형적인 족보에서 벗어나 제 1세계의 장르적인 계보를 독자적으로 이어나간 듀나 스스로에 대한 메타적/자조적인 농담이라는 점을 구태여 지적하고는 한다.

 

<아퀼라의 그림자>

적사병으로 인해 남한이 국제적으로 봉쇄된 미래, 병의 후유증으로 초능력을 얻게 된 초인들이 히어로와 빌런이 되어 격돌하는 슈퍼 히어로 물이다. 그리고 이 슈퍼 히어로들은 아이돌처럼 그룹으로 만들어지고 팬픽이 쓰여지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중심으로도 자리잡는다. K팝 아이돌과 슈퍼 히어로 그리고 디스토피아 장르를 조화롭게 아우르는 아퀼라 연작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


듀나의 작품에 대한 소개는 얼추 마쳤으니, 얼마 전 듀나 작가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의 비평집 <D는 묵음입니다만>에서 다른 작가들이 듀나에 대해 평한 부분을 발췌해보도록 하겠다.

최의택은 비평집에 서문에서 PC통신 시절부터 듀나라는 존재가 열심히 우리나라 땅에 해외 SF의 씨앗을 심어 가꾸고 개량해 온 덕분에, 나 같은 사람이 우리 몸과 정신에 알맞은 과실을 먹는 게 너무나도 당연해졌(주석: 최의택, 「한국에도 SF는 있었다」, 『D는 묵음입니다만』, 읻다, 2024, 9p.)다고 정리했다. 이서영은 듀나의 글이 공고한 ‘장르적 문법’이 형성된 과정과 맥락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오랫동안 관찰해 왔다는 점(주석: 이서영, 「듀나스 올 댓Djuna’s All That」, 위의 책, 17p.)을 높이 평가했다. 이산화는 듀나의 작품 속에서 아름답고 비범한 아이들, 동물, 그리고 흑백영화 시대 여배우의 유산. 나머지는 일고의 동정도 없이 땅바닥에 내팽개칠 뿐(주석: 이산화, 「듀나의 방주 밖에 남겨진 가치」, 위의 책, 20p.)이라 지적하며 듀나의 글에 담긴 섬뜩함을 강조했다.

 

위의 소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듀나는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는 한 개인의 내면과 감각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한국기성문단의 문법으로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는 한 개인의 내면과 감각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듀나는 장르의 문법으로 이야기를 한다. 듀나는 각종 장르의 포뮬러와 컨벤션 그리고 아이콘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하며 이를 자신의 문화적 취향과 합리적 원칙에 맞게 변주하여 작품을 만든다. 그리고 그가 다루는 소재 또한 한국의 현재에 머무르지 않는다. 듀나는 오래된 헐리웃 고전영화나 최신의 클래식 연주자 그리고 미래의 외계문명을 넘나들며 소설을 쓴다.

듀나는 장르적으로 넓고 깊은 기반을 가진 작가다. 그는 해외의 고전문학과 헐리웃 고전 영화에 통달했으며 한국상업영화와 아이돌 시장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또한 듀나는 능숙하게 자신이 가진 데이터베이스를 독자적인 세계관에 담아내기까지 한다.

한국기성문단이 '진짜'를 추구하느라 매몰된 와중에도 듀나는 아예 대놓고 '가짜'의 영역에 속한 세계를 다루었다. 심지어 수치심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진짜'라는 개념이 감추고 있는 허구적 기만을 폭로하기까지 하는데 그 태도마저 심드렁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진짜'가 되기 위해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는 한 개인의 내면과 감각을 재현하고 모방하는 것에만 집착하는 한국기성문단에게 듀나는 이해불가능한 존재였던 셈이다.

한국기성문단이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는 한 개인의 내면과 감각을 재현하고 모방하는 과정은 결국 스스로를 데이터베이스로 삼아 자가복제를 반복하는 일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반면 듀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국에서 살고 있는 소수자와 타자들이 겪을 법한 사건을 해외의 걸작과 한국의 상업예술로 가득 찬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제시한다. 한국기성문단의 족보에는 듀나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고 누구도 그와의 촌수를 셀 수 없었기에 듀나는 항상 가짜 문학인 취급을 받았다.

 

결국 듀나는 변방에서 글을 써야만 했다. 듀나는 작품활동을 문예지 등단이 아닌 PC통신 게시판의 동아리에서 출발했다. 비록 그의 데뷔 초, 문단이 그를 잠시 주목했던 적은 있으나 깊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듀나의 지면은 전국에 초고속통신망이 설치된 이후 듀나 개인의 홈페이지로 확장되었다. 영화광들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예술계 종사자와 애호가들이 그의 홈페이지에 모였다. 듀나는 자신의 영토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들어야 했고 또 이에 성공했던 것이다.

듀나를 받아들인 것은 한국기성문단이 아닌 영화 매체였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듀나는 헐리웃의 고전 영화부터 한국의 독립 영화까지 폭넓은 관심사를 갖고 있었다. 듀나의 장점 중에는 넓고 깊은 데이터베이스를 갖고 있으면서 이 안에 가득 들어있는 정보를 자신만의 분류 기준에 맞게 계보의 형태로 그려나갈 수 있다는 점도 있다.

듀나는 영화 한 편을 소개하더라도 그 작품이 어떤 계보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었다. 작품을 보고 떠오르는 막연한 인상 비평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감독의 전작은 무엇이고 배우의 성격은 어떠하며 제작자는 누구이며 당시 극장에 걸려있던 다른 작품으로는 무엇이 있는가까지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듀나는 자신만의 영토에서 평화롭게 살았다. 꾸준하게 작품을 찾아보았으며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했고 가끔은 자신의 작품에 반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1990년대부터 2010년대 이전까지의 이야기다. 이후, 몇 가지 문화적 변화와 함께 듀나의 영토가 넓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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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이후 한국의 변화에 대해 몇 가지 적어보겠다. 우선 한국기성문단의 정체가 있겠다. 한국기성문단은 여전히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는 한 개인의 내면과 감각을 재현하고 모방했다. 하지만 이 재현과 모방의 성격이 달라지고 말았다.

이전까지 한국기성문단이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는 한 개인의 내면과 감각을 재현하고 모방하는 작업은 기록과 고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역할은 2010년대가 지나면서 기록과 고발에서 전시와 관람으로 변질되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한국기성문단의 교육자 중 몇몇이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현실을 구질구질하게 묘사하는 것야말로 곧 '진짜'를 쓰는 것이라고 강요하는 경우에 대해서 크나큰 불만을 갖고 있다. 나는 한국기성문단의 교육자 중 몇몇은 현실이 구질구질하다고 믿고 현실이 구질구질하다 가르치며 현실을 구질구질하게 묘사함으로써 현실을 구질구질하게 만들었다는 혐의를 갖고 있다.

이번에도 부디 나의 한국기성문단에 대한 이 진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면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나는 한국기성문단에 속하지 않았으며 속할 생각도 없는 외부자이자 비전문가다. 그러므로 나의 이 진단은 외부자가 내부자들에게 갖는 오만하고 독단적인 편견에 불과할 것이다. 다만 2010년대 이후, 나처럼 한국기성문단에 대한 반발심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났던 것은 분명하다. 이 사람들은 한국기성문단을 '노란장판 감성'이라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노란장판 감성'의 '노랑장판'은 2010년대 이전, 한국의 가정집에서 흔히 사용되던 값싼 재질의 노란색 장판을 가리킨다. 이 노랑장판은 수많은 소설과 영화 그리고 드라마에서 궁핍함과 처연함의 이미지로 활용되었다.

미감적인 디자인이나 색의 조화를 고려하지 않고 공장에서 기계적으로 찍어낸 저렴한 생김새나 눅눅하고 끈적한 촉감까지, 발에 쩍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는 노랑장판은 한국 근현대사를 살아온 이들에게 있어 아무리 벗어나고 싶어도 끊임없이 달라붙는 구질구질한 현실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이 '노랑장판 감성'은 한국 사회가 기존과는 다른 관점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며 이것만이 우리에게 가능한 현실이 아닐 수 있다는 깨달음과 함께 비판과 비아냥 그리고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하고만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기성세대라는 기득권에 대한 분노와 가난한 노동자 계급에 대한 멸시가 뒤섞인 조롱이라는 점에서 양가적인 성격을 갖고 있기도 하다.

 

약간의 비약을 섞어 말하자면, 이러한 변화는 한국사회 내부가 아닌 외부의 변화에서 기인했다. 이 변화란 바로 스마트폰의 등장을 말한다. 스마트폰의 등장은 곧 한국의 문화향유층이 해외의 콘텐츠를 접하는 결과로 이어졌고, 이러한 해외 콘텐츠의 유입은 국내 콘텐츠를 보다 객관적인 시선에서 평가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물론 스마트폰이 등장하기 전에도 한국의 인터넷 문화는 상당히 발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문화향유층은 온라인을 통해 국내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지냈고, 굳이 해외 콘텐츠를 찾아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스마트폰의 등장은 이런 개방되었음에도 폐쇄적이었던 환경을 보다 더 개방된 환경으로 바꾸었는데 성공했다. 한국의 문화향유층이 유튜브와 넷플릭스에 이전보다도 훨씬 더 강렬하게 몰입하게 된 것이다.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해외의 정보는 즉각 한국에 전달되었다. 한국의 문화향유층은 '노란장판 감성'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 알고 있던 것들도 직접 확인하게 될 때 오히려 더 큰 충격을 받는 경우도 있다. 한국의 문화향유층은 스마트폰의 충격으로 '노란장판 감성'에서 깨어나 그 너머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탐색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문화향유층이 온라인을 통해 해외의 콘텐츠를 접함으로써 얻은 교훈은 '노란장판 감성'에 대한 자각만이 아니었다. 글로벌 콘텐츠 시장의 문법과 이를 수행하기 위한 요건들에 대한 깨달음 또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한국의 문화향유층은 해외 콘텐츠의 흐름에 맞추기 위해서 많은 것을 배워야 했다. SF와 환타지처럼 장르적인 성격이 강한 작품이 갖고 있는 예술적 가능성, 상업적 콘텐츠에게 요구되는 창작윤리, LGBTQ를 비롯한 소수자 인권에 대한 인식, 제1세계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제3세계와 제3세계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제1세계 사이의 간극 그리고 미래에 대한 상상력까지 너무나 많은 것을 모른 척하고 살아왔다는 반성 또한 이어졌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한국의 문화 향유층에게 있어 하나의 반전처럼 다가왔다. 스마트폰의 등장 덕분에 멀게만 느껴졌던 해외 콘텐츠 시장에 개척자처럼 달려간 결과, 마침내 발견한 것들이 이미 한국 콘텐츠 시장 내부에서 그들이 깔보고 외면하던 누군가가 수행하던 작업물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결국 이제야 한국의 문화 향유층은 한국기성문단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는 듀나가 한낱 이방인에 불과하겠으나, 한국 외부에 존재하는 글로벌한 시장의 시선에서 보았을 때는 듀나야말로 오히려 주류이자 정통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듀나는 SF와 환타지를 썼다. 창작윤리에 대해 고민했다. LGBTQ 이슈를 다루었다. 제1세계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제3세계와 제3세계에서 바라보는 제1세계 사이의 간극을 묘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듀나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듀나는 '노란장판 감성'에 갇혀 있지 않았다. 듀나는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는 한 개인의 내면과 감각을 재현하고 모방하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미래 우주 어딘가에 존재하는 한 세계의 문화와 변화를 이야기했다. 현재의 한 순간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리고 우리가 그 변화를 어떻게 수용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에 또 하나 쐐기가 박히는 사건이 있었다. 바로 2010년대 중반 한국사회에 페미니즘 리부트 운동이다. 여성 대상의 혐오범죄에 대한 문제제기와 문단 내 성폭력 고발 그리고 미투 운동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문화향유층의 시선이 크게 뒤바꾼 사건들이 페미니즘 리부트 운동이라는 커다란 흐름 안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페미니즘 리부트는 한국기성문단의 기조 또한 바꾸었다. 기존의 한국기성문단이 우리가 어떠한지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까지 말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은 다시 한 번 듀나와 한국SF문학시장를 향한 주목으로 이어졌고, 이들 또한 그에 호응했다. 2010년대 중반 이후의 한국 SF는 페미니즘 리부트 국면을 맞아 동시대의 페미니즘 의제들을 SF 사고실험에 적극적으로 운용하(주석: 강은교, 「페미니스트 세계만들기(worlding)로서 듀나의 SF에 대한 연구」, 여성문학연구 56호, 2022, 418p.)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SF는 항상 우리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왔으니 말이다. 한국SF문학시장은 언제나 소수자의 이야기에 주목했다. 사회를 구조적이고 시스템적으로 분석했다. 현재가 아닌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미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덕분에 한국SF문학시장은 비약적으로 성장했고 새로운 흐름을 만드는데 성공했으며 듀나는 재차 재조명을 받았다.

이 모든 변화를 듀나가 이룬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이 변화를 주도한 사람들이 모두 듀나의 뒤를 따른 것일까? 몇몇은 분명 그렇다. 물론 이 변화가 모든 것을 바꾸지는 못했다. 안타깝지만 이 변화의 한계 또한 명확했다. 오히려 반동으로 인해 이전보다 크게 퇴보한 영역마저 있다. 비록 현재진행형의 문제이기에 여기에서 더 설명하기에는 너무 복잡해 분석을 이어나가지는 못하겠지만, 이 변화와 이 변화가 가진 의미는 분명히 크다.

카산드라는 다른 이들이 편견과 무지로 인해 받아들이지 못하는 미래를 직시하고 예언했다. 안티고네는 다른 이들이 상상력의 부재와 이기심으로 인해 무시하던 원칙을 바로세우고 고수했다. 그런 점에서 듀나는 카산드라였고 안티고네였다. 그리고 듀나만이 알던 그 사실을, 이제는 다른 이들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듀나는 어떻게 카산드라이자 안티고네일 수 있었을까? 그가 한 일은 단순하지만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듀나는 그저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하고 여기에서 우리의 논리가 내적 완결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우리의 태도가 미적 성실성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때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듀나는 그렇게 카산드라이자 안티고네가 될 수 있었다. 그의 고민은 시간과 공간의 장벽을 넘어서 인류보편 혹은 인류를 넘어서는 보편의 무엇을 겨냥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한국SF문학시장의 일원들은 항상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는 듀나가 있다. 맞다. 우리에게는 듀나가 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저 관습에 기대어 상상하기를 멈춘 많은 것들이 유통기한을 다해 스러지고 사라진 뒤에도, 어쩌면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도 훨씬 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듀나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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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운

본명 홍석인. 공상연애소설가. 청강대 웹소설창작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