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SF 작가 홍지운입니다. 갑작스럽게 느껴질 이야기이겠습니다만, 제가 이 직업을 고르고 또 SF를 쓰게 된 이유는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를 만나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가 된다면 맥플러리를 열다섯 컵도 먹을 수도 있을 것이고 강아지나 고양이와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며, 밤새도록 달을 보고 산책한 다음에 출근을 준비해도 별다른 피로를 느끼지 못할 테니까요. 그렇게만 된다면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영원토록 즐길 수 있을 테고요.
그러니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를 만나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라면, SF 작가가 되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했지요.
무슨 황당한 소리냐고 따질 분들도 계시겠습니다만, 수많은 걸작을 쓴 SF 작가들을 떠올려보세요. 답답하기 짝이 없는 로봇들을 관리한 경험 없이도 아이작 아시모프가 로봇 3원칙의 딜레마를 작품 안에 담아낼 수 있었을까요? 앤 라이스도 그 질척거리는 흡혈귀들의 스캔들에 휘말리는 바람에 뱀파이어 연대기에서 장렬한 폭로를 저지를 수 있었을 테고요. 룻거 하우어 역시 탄호이저 게이트에서 지내면서 명상에 빠졌기에 쏟아지는 인공우 속에서 그 대사를 떠올리는 게 가능했겠지요.
이런 실제 사례를 빼고 보더라도 저의 논리는 명확합니다.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 관심이 만남으로 이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SF 작가가 되는 방법이 최선의 선택지인 것은 분명하니까요.
물론 다른 차선책이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대통령이나 국제기구 고위 관료와 같은 직업을 목표로 할 정도로 ‘품위 없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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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은 전적으로 듀나의 소설 덕분이었습니다. 듀나는 여러 면에서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를 만나 인간을 초월하게 되었거나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 같은 작가니까요.
아시다시피 듀나의 작품에서는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를 만나 인간을 초월하는 등장인물이 무척 자주 등장합니다.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가 아닌 다른 계기까지 포함한다면 그 수는 배로 늘어날 것입니다.
듀나는 적지 않은 작품 속에서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정체성의 변이가 어떤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다양하게 그려왔으니, 제 생각은 그의 소설을 열심히 읽은 독자로서 자연스레 떠올릴 만한 발상이었습니다.
〈꼭두각시〉에서 살인자가 자유의지의 불가능성을 설파하며 살해를 정당화하는 장면이나 〈미치광이 하늘〉에서 ‘루시 헌트’가 전능에 가까운 능력을 얻은 뒤 겪은 여정을 떠올려 보십시오. 듀나는 자유의지에 대한 집착 따위는 시작부터 내려놓고 항상 그다음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를 만나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고 싶었던 저에게, 듀나는 요주의 인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듀나가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를 만나 인간을 초월하게 되었거나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 같은 작가가 아니더라도,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나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를 만나 인간을 초월하게 된 존재라면 이미 듀나에게 주목하고 있거나 그와 관계를 맺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이 심증을 굳히게 된 계기는 역시 듀나의 초기 단편집인 《면세구역》이었습니다.
지금 그에겐 강아지만큼의 지성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가 할 줄 아는 일이라고는 지금 보시는 것처럼 저 격납고 옆 벤치에 앉아 우주선들이 드나드는 것을 바라보는 것뿐입니다. 언젠가 그는 몰래 저 안에 숨어들어 우주선을 탈취해 그를 부르는 천국으로 뛰어들려 하겠지요. 그리고 이 스테이션의 사령관인 나는 그를 막아야만 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 필요가 있는지 나는 아직도 의심스럽습니다. 1)
이 책의 수록작인 〈로렐라이〉의 마지막 장면을 보세요. 듀나에게 있어서는 인간성의 상실조차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합니다.
하다못해 〈구부전〉의 시아버지가 뱀파이어가 된 스스로에게 납득할 만한 학설을 세우기 위해 주리파(主理派)에서 주기파(主氣派)로 전향하는 과정을 다룰 때조차 “내가 뱀파이어이니 뱀파이어에 유리한 철학 체계를 만들겠다” 같은 이기적이고 유치한 욕망과는 상관이 없 2) 는, 이지적인 사고의 흐름이었을 뿐이라고 묘사하지 않던가요?
김태환이 해설에 적은 바와 같이 “인간적인 것을 되찾아야 한다는 휴머니즘적 메시지는 듀나에게서 찾아볼 수 없” 3) 으며, “기계 문명을 자연과 우주의 거대한 변전 속에서 파악하는 듀나의 소설은 냉정한 어조로 SF적 상상력의 폭을 확장” 4) 할 뿐입니다.
확장.
듀나는 확장만 할 수 있다면 무엇 하나 개의치 않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듀나의 태도―《면세구역》의 뒤표지에 실린 홍보 문구처럼 ‘매정하고 기묘한’ 그 태도는,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를 만나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고 싶었던 저에게 있어 무척이나 동경할 수밖에 없는, 선구자의 무엇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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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입시를 마치고 간신히 대학생이 된 뒤로 SF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주변에서는 그런 저를 한심하게 바라보곤 했습니다. 요즘과 달리 20년 전에는 SF에 대한 인식이 그렇게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친구에게 함께 SF를 써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가 비웃음을 산 적도 있지요. 교수로부터 “SF는 소설이 아니다”라고 질책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 친구나 교수님이나 다 저와 개인적으로 가까운 분들입니다만.
그분들이 SF를 낮춰 본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SF는 사람들의 실제 인생을 조명하지 않는다.”
이 주장은 여러 각도에서 반론이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래서 SF가 더 좋다고도 생각했으니까요. 제가 바라던 것은 처음부터 항상 같았으니까요.
바로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를 만나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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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학부와 석사 과정을 거치는 동안 글만 쓰지는 않았습니다. 서점을 돌아다니며 장르문학의 여러 고전을 찾아보고 도서전의 줄을 서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한 주에 영화를 적어도 세 편 이상 보았으며 영화제나 시사회 이벤트를 쫓아다니는 데에도 열심이었습니다. 의식적으로 한 일은 아니었지만 저는 은연중에 듀나를 본보기로 삼았던 것이지요.
아니, 애초에 한국에서 듀나의 발자취를 피하는 것부터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어떠한 문화적인 경험을 하더라도―특히나 장르적인 경험이라면―반드시 듀나의 편린을 만나게 되었으니까요. 듀나가 그려나간 궤적이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기준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좋은 참고가 되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저는 좀 더 싸구려 취향에 근본 없이 SF, 판타지, 호러 그리고 미스터리를 겉핥기로 접근하기는 했지만요. 그리고 이렇게 저만의 궤적을 그려나가는 과정은 곧 제가 쓴 SF에 녹아들어 갔습니다. 이 때문에 저의 잡탕스러운 장르적 경험은 엉망인 결과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잦았습니다. 그 바람에 “네가 쓴 것은 SF가 아니다”라는 비판도 자주 들었지만 저는 딱히 개의치 않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들 네 장르가 얽혀 있다는 게 아니라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상의 경험을 넘어서는 극단적인 체험 말이죠. 그 체험은 극단적인 이성과 극단적인 비이성의 영역에 놓여 있습니다. 극단적인 이성은 퍼즐 미스터리와 하드 SF, 극단적인 비이성은 호러와 판타지가 대표한다고 생각하면 편하겠지만 많은 경우 이들은 자연스럽게 공존합니다. 오히려 극단적일수록 함께 있는 경우가 많지요. 5)
듀나의 뒤에 숨어 저 자신을 변명하자면, 저는 비록 겉핥기에 잡탕스러운 취향이었을지언정 제가 겨냥하는 바는 항상 일관적이었습니다. SF는 제가 겨냥하는 것을 노리기 위한 도구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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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를 쓰면서 제 인간관계도 넓어졌습니다. 취향이 같은 친구들도 많이 만났으며 저와 뜻을 함께하는 동지들도 생겼습니다. 이곳저곳에서 SF와 관련된 행사나 수업을 찾아 들은 덕분이었습니다. 창작 합평이나 장르와 관련된 강의 그리고 저자와의 만남까지, 저는 온갖 곳을 돌아다녔고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제가 만난 사람들 대부분은 어떤 형태로든 듀나에게 영향을 받은 이들이었습니다. 〈수련의 아이들〉에서 수련의 위벽에 붙어 있는 아이들처럼은 아니어도, 우리 역시 듀나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듀나에게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상관없이 말이지요.
작업도 그럭저럭 잘 풀렸습니다.
지망생 시절을 8, 9년이나 보내기는 했지만, SF 작가로 데뷔도 했고 SF와 관련된 칼럼이나 영화 평론 등의 일거리도 생겼으니까요. 글쓰기는 항상 재밌었고요.
무엇보다 목표에 따른 성과도 있었습니다. SF 작가로 데뷔하면서 초자연적인 존재들과 몇 번 마주쳤던 것이지요. 고대의 기술을 빌려 태어난 초능력자나 M78 성운에서 온 외계인 그리고 영혼을 갖게 된 인공지능을 만나면서 제가 쓰는 SF의 지평도 넓어졌습니다.
그중에는 듀나의 작품 속에 나왔던 그 양반들이 아닌가 싶은 존재들도 있었습니다. 〈거울 너머로 건너가다〉의 바바야가 정글과 똑 닮은 환경의 행성에서 온 독립영화 배우나(요즘에는 유튜버로 전향하셨지만요) 〈각자의 시간 속에서〉의 의식 대통합을 마친 시간 침략자와 비슷한 존재를 피해 도망 다니는 시공 난민과 짧게나마 술자리를 가진 적도 있었으니까요.
이렇게 꾸준히 SF를 쓴 덕분이었을까요?
데뷔 5년 차가 되었을 무렵, 저는 공개 계정으로 유니코드로는 입력할 수 없는 문자로 적힌 메일을 받았습니다. 네. 바로 제가 원하던 대상이 보낸 메일이었습니다.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었지요.
(번역기를 돌리기는 했습니다만) 메일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성간 문명에서는 서로 간섭을 하지 않은 것이 대원칙이다. 하지만 당신처럼 저차원적인 지능을 가진 인간이 그렇게나 바란다면 뭐가 되었건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정도의 도움은 줄 수 있다. 당신이 정녕 그것을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네. 바로 제가 원하던 내용이었지요.
하지만 그 메일을 받은 순간, 글쎄… 제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이게 맞는지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당분간은 저차원적으로 해야 할 일이 몇 가지 있어서요. 제가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결국 저는 (사전을 몇 종류나 펼쳐보는 중역을 거친 끝에) 답 메일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는 알겠다고 답신을 주었고요. 휴. 바로 제가 원하던 대상이 제 코앞에 다가왔음에도 오히려 저의 방황이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데뷔를 준비하는 8년, 데뷔하고 나서 5년의 짧지 않은 세월을 바쳐가며 얻은 기회였는데도 말이지요.
저는 도대체 무엇이 두려웠을까요?
혹시 〈너네 아빠 어딨니?〉의 좀비가 된 아빠나 〈아이들은 모두 떠난다〉의 고치를 벗어난 아이들처럼 변해버릴까 봐 두려웠던 것은 아닐까요? 듀나의 작품 속에 나오는 정체성의 변이 중에는 인간을 초월하는 것이 아닌, 퇴락하거나 왜곡되는 경우도 있었으니까요.
저 또한 취재하는 도중 지성을 갖춘 대통령의 항문에게 물리거나 외계 침략자가 만든 놀이공원에 갇혀 인형 탈 중 하나가 될 뻔하거나 술자리에서 버림받은 곰 인형에게 붙잡힌 나머지 맛이 갈 정도로 취하기도 했고요. SF 작가로 살기란 이렇게나 험난하답니다.
어쨌든 일단 목표는 잠시 잊고 작업에만 몰두하기로 했습니다.
글쓰기는 언제나 재밌었거든요. 또 SF 작가는 생업이 되었고 칼럼에서 에세이로, 평론에서 연구로 일거리가 이어지기도 했지요. 만약 다른 마음을 먹었다 하더라도 마감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었을 거예요.
제가 이렇게 바닥을 긁건 말건 듀나는 계속해서 작품을 보고 글을 썼습니다. 듀나를 읽지 않았거나 무시했던 사람들도 〈스핑크스 아래서〉에 나왔던 모종의 단체처럼 부분 부분 비어 있는 한국의 SF 역사를 채우고자 자신의 과거와 추억에 적극적으로 듀나를 집어넣기 시작했고요. 반면 SF의 저변이 무척 넓어진 덕분인지, 아예 듀나의 영향을 받지 않은 작가들도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사이 저는 결혼도 하고 강의도 하러 다니다가, 아예 대학에 임용되어 학생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SF만 다루는 수업도 운영하고 1박 2일 TRPG 캠프도 진행하고 재밌게 지냈지요. 취향의 씨앗을 곳곳에 심고 뜻을 함께하는 동지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고나 할까요? 이렇게 SF를 쓰면서 제가 얻은 것이 무척 많아졌고, 그만큼 잃을 것도 많아지고 만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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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겨냥하는 것을 노리기 위한 도구들은 하나같이 그 이상의 의미를 품게 되었습니다. 듀나의 표현을 약간 비틀어서 빌리자면, 주변의 차를 그냥 기계로 보지 못하고 사람이 타고 있는 탈것으로 보게 된 상황이었습니다.
설경구가 나오는 〈해결사〉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에서 살인 누명을 쓴 전직 형사로 나오는 설경구의 캐릭터는 고생 끝에 누명을 벗고 범인의 정체와 음모를 밝힌다. 이제 그는 그만해도 된다. 하지만 순전히 범인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는 엄청난 카체이스를 벌인다. 그러는 동안 재수 없게 소동에 말려든 수많은 자동차들은 날아가고 폭발한다.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그 차 안에 사건과 전혀 관계없는 무고한 사람들이 타고 있었고, 그 사람들이 사고로 죽거나 끔찍한 부상을 입었을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은 모양이다. 아무런 죄의식 없이 영화의 해피엔딩을 받아들이는 주인공이 그 증거다. 차 안에서 불타 죽어간 사람들은 그저 멋진 카체이스의 장식에 불과했던 거다. 6)
듀나가 지적한 바와 같이 사람을 장식으로 보았던 제가 사람을 사람으로 보게 된 뒤로부터는 저 자신을 지키지 못한 채 타자의 개입을 경험하게 되었고, 이는 제가 바라 마지않던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를 만나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일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으로 이어졌습니다. 어떤 존재의 개입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나의 감정이 사라진다면, 내가 원하지 않는 사랑을 갖게 된다면 그런 잡탕스러운 변화가 곧 나의 변화라고 해도 될 무엇일까요? 이제까지 열심히 SF를 써온 보람도 없이, 저는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도 모르고 그저 헤매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좀 더 진지하게 원점부터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란 무엇인지부터 고민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바이러스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과거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돈이 얼마나 많고 권력이 아무리 강하더라도―오히려 그런 사람일수록―코로나의 영향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네,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변종 생명체가 나타나 인간을 시체로 바꿔버리는 세상이 열린 것입니다.
우연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저는 이것 또한 운명이라고 느꼈습니다. 서점이 아닌 온라인으로 책을 주문했고 도서전은 비대면으로만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구독하는 OTT 서비스는 어느새 다섯 군데가 넘었으며 영화제나 시사회 이벤트는 후기만 찾아보았습니다. 오로지 집에 앉아서 글만 쓰며 지내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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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변종 생명체가 나타나 인간을 시체로 바꿔버리는 세계.
제가 바라던 것이 아주 일그러진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이제껏 SF가 그려왔던 이미지가 일상이 되고 만 것이지요. 좀비 영화처럼 백신과 의약품이 동이 났고 디스토피아 소설처럼 지하철의 요금 계산기는 카드를 찍을 때마다 마스크를 쓰고 지하철을 타라는 경고문을 읊었으며 미래에서 온 안드로이드가 주인공을 가르치는 학습 만화처럼 모든 수업은 화상으로 진행해야만 했습니다. 적지 않은 SF 작가들이 이런 상황에 대비한 전문가 취급을 받으며 쏟아지는 인터뷰에 얼떨떨하게 대답해야 했고요. 이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주장을 공유합니다.
“SF야말로 사람들의 실제 인생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분들이 말하는 SF가 제각기 다 다른 내용이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저는 뭐 어떤 의견이든 재밌게 들었습니다. 교수가 되어서 “SF 소설을 가르칩니다”라고 소개를 해도 어색하지 않게 되었고요. SF를 써보면 어떻겠냐는 저의 제안을 비웃던 친구도 이제는 SF를 쓰고 있습니다. 20년 전과 달리 요즘에는 SF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달라진 덕분이지요. 저는 그런 주변의 모습이 신기합니다. 대학 입시와 데뷔를 위해 SF를 공부하는 학생들을 보며 지내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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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러한 저의 고민, 《장르 세계를 떠도는 듀나의 탐사기》의 뒤표지에 실린 홍보 문구를 빌리자면 “거기 계신 분들! 안개 저편에서 꿈틀거리는 뭔가가 보이나요?”라는 질문에 대한 그 고민은, 얼마 전 듀나의 단편집을 읽은 제 아내가 지나가듯이 남긴 짧은 인상비평에 의해 정리되고 말았습니다.
“SF 작가들은, 그러니까 듀나는 참 긍정적이지 싶어.”
긍정.
듀나가 “매정하고 기묘”하다거나 “냉정한 어조로 SF적 상상력의 폭을 확장”해 왔다는 기존의 평가는 그조차도 인간중심주의적인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의 편견이었을 뿐, 아내가 말한 바와 같이 듀나는 그 누구보다 긍정적인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이를테면 〈미래관리부〉에서 시간 여행을 통한 후손들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목도하는 주인공이 현생인류의 유전자와 시스템, 개인의 의지가 모두 후손들에 의해 좌지우지될 것을 예상하면서도, 미래가 어떻게 예정되어 있건 아직은 자신만의 쾌락과 욕망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긍정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듀나에게 있어서 인간성의 상실조차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할지언정, 그 긍정에는 분명한 방향성이 있습니다. 《구부전》에 수록된 〈추억충〉의 마지막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상관없었다. 윤정은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이제 이 감정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누구를 거쳤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사랑 자체였다. (…) 은성에 대한 사랑은 그대로일 것이고 그 뒤로도 윤정의 일부로 남아 그녀의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건 좋은 일이라고. 정말로 좋은 일이라고 윤정은 생각했다. 7)
〈추억충〉은 듀나가 정체성의 변이를 대하는 태도를 무척이나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그리고 듀나가 정체성의 변이에 대해 이 작품에서, 나아가 그의 작품 전반에서 보여주는 태도는 매정이나 냉정으로 읽힐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이는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매몰찬 거절이나 가혹한 비판이라기보다는, 편협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서 보다 더 많은 것과 보다 더 다른 것을 사랑할 가능성을 긍정하고 전향적으로 기대하고자 함이라 보는 편이, 가능한 꿈의 영역을 탐구하고자 하는 기개라 보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니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를 만나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고 싶을 뿐이었던 저에게, 듀나는 오독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듀나는 논리적 일관성 속에서 취향에 대해 항상 강조하면서 또 상상력의 부재가 가져올 종말을 이야기해 왔는데도 말이에요. 〈첼로〉에서 ‘이모’가 로맨스의 핵심이 비이성에 있고 이 쓸데없는 유아론만 극복하면 된다며 ‘트린’에 대한 사랑을 설파하는 장면이나 〈사춘기여, 안녕〉에서 사람들이 여전히 연우의 아버지가 쓴 시나리오를 찾는다는 설정처럼요.
듀나는 적지 않은 작품 속에서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정체성의 변이가 어떤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다양하게 그려왔으며, 그 이상으로 취향과 사랑에 대한 품위 있는 고집을 지켜오지 않았습니까?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에 대한 저의 집착으로 인해 이제껏 의식도 못 했던 것입니다. 듀나의 작품에서 단지 그다울 뿐인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요.
아무리 듀나가 여러 면에서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를 만나 인간을 초월하게 되었거나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 같은 작가인 것은 맞다고는 하더라도 말이에요. 감사하게도, 이번 역시 아내의 도움을 받은 뒤에야 제대로 된 독해를 해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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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는 제가 그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품위 있게 저를 기다려주었습니다. 저는 일단 제가 다른 이에게 도움을 받기 전에 주변의 사랑해야 할 사람들부터 사랑하는 것이 최선이지 않겠느냐며 답장을 보냈어요.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도 저의 의견에 동의를 해주었고요. 앞으로 제가 잘 해낼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지만요.
여기서부터는 그저 에밋 브라운의 격려에 기대야겠지요.
그래서 요즘에는 학생들과 여러 SF 작품을 골라서 읽고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학생들도 제가 좋아하는 작품들을 읽고 즐거워하더군요. 그것 말고도 아내와 저속 노화 식단도 같이 만들어서 먹는다거나 강아지와 고양이의 생활 습관에 대한 유튜브를 본다거나 시간이 나면 짧게나마 강변을 산책한 다음에 수업을 준비한다거나 하고 있답니다.
맥락 없이 쓴 이야기였습니다만,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를 만나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고 싶었던 제가 듀나의 작품 속에서 나타나는 정체성 변이 테마에 관하여 고민하며 얻은 교훈에 대한 정리는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SF 작가 홍지운, 정확히 말해 듀나가 〈셰익스피어의 숲〉에서 저자와 비슷하게 행동하도록 설계했던 소설 속 화자를 따라 만든 소설 속 화자 홍지운이었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석
1) 듀나, 〈로렐라이〉, 《면세구역》, 북스토리, 2013년, 286쪽.
2) 듀나, 〈구부전〉, 《구부전》, 알마, 2019년, 52쪽.
3) 김태환, 〈해설-인간과 기계〉, 《태평양 횡단 특급》, 문학과지성사, 2002년, 307쪽.
4) 위의 책, 308쪽.
5) 듀나, 《장르 세계를 떠도는 듀나의 탐사기》, 우리학교, 2019년, 76쪽.
6) 듀나, 《가능한 꿈의 공간들》, 씨네21북스, 2015년, 82~83쪽.
7) 듀나, 〈추억충〉, 《구부전》, 알마, 2019년, 1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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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운
본명 홍석인. 공상연애소설가. 청강대 웹소설창작전공 교수.
안녕하세요. SF 작가 홍지운입니다. 갑작스럽게 느껴질 이야기이겠습니다만, 제가 이 직업을 고르고 또 SF를 쓰게 된 이유는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를 만나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가 된다면 맥플러리를 열다섯 컵도 먹을 수도 있을 것이고 강아지나 고양이와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며, 밤새도록 달을 보고 산책한 다음에 출근을 준비해도 별다른 피로를 느끼지 못할 테니까요. 그렇게만 된다면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영원토록 즐길 수 있을 테고요.
그러니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를 만나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라면, SF 작가가 되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했지요.
무슨 황당한 소리냐고 따질 분들도 계시겠습니다만, 수많은 걸작을 쓴 SF 작가들을 떠올려보세요. 답답하기 짝이 없는 로봇들을 관리한 경험 없이도 아이작 아시모프가 로봇 3원칙의 딜레마를 작품 안에 담아낼 수 있었을까요? 앤 라이스도 그 질척거리는 흡혈귀들의 스캔들에 휘말리는 바람에 뱀파이어 연대기에서 장렬한 폭로를 저지를 수 있었을 테고요. 룻거 하우어 역시 탄호이저 게이트에서 지내면서 명상에 빠졌기에 쏟아지는 인공우 속에서 그 대사를 떠올리는 게 가능했겠지요.
이런 실제 사례를 빼고 보더라도 저의 논리는 명확합니다.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 관심이 만남으로 이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SF 작가가 되는 방법이 최선의 선택지인 것은 분명하니까요.
물론 다른 차선책이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대통령이나 국제기구 고위 관료와 같은 직업을 목표로 할 정도로 ‘품위 없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은 전적으로 듀나의 소설 덕분이었습니다. 듀나는 여러 면에서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를 만나 인간을 초월하게 되었거나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 같은 작가니까요.
아시다시피 듀나의 작품에서는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를 만나 인간을 초월하는 등장인물이 무척 자주 등장합니다.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가 아닌 다른 계기까지 포함한다면 그 수는 배로 늘어날 것입니다.
듀나는 적지 않은 작품 속에서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정체성의 변이가 어떤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다양하게 그려왔으니, 제 생각은 그의 소설을 열심히 읽은 독자로서 자연스레 떠올릴 만한 발상이었습니다.
〈꼭두각시〉에서 살인자가 자유의지의 불가능성을 설파하며 살해를 정당화하는 장면이나 〈미치광이 하늘〉에서 ‘루시 헌트’가 전능에 가까운 능력을 얻은 뒤 겪은 여정을 떠올려 보십시오. 듀나는 자유의지에 대한 집착 따위는 시작부터 내려놓고 항상 그다음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를 만나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고 싶었던 저에게, 듀나는 요주의 인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듀나가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를 만나 인간을 초월하게 되었거나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 같은 작가가 아니더라도,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나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를 만나 인간을 초월하게 된 존재라면 이미 듀나에게 주목하고 있거나 그와 관계를 맺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이 심증을 굳히게 된 계기는 역시 듀나의 초기 단편집인 《면세구역》이었습니다.
지금 그에겐 강아지만큼의 지성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가 할 줄 아는 일이라고는 지금 보시는 것처럼 저 격납고 옆 벤치에 앉아 우주선들이 드나드는 것을 바라보는 것뿐입니다. 언젠가 그는 몰래 저 안에 숨어들어 우주선을 탈취해 그를 부르는 천국으로 뛰어들려 하겠지요. 그리고 이 스테이션의 사령관인 나는 그를 막아야만 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 필요가 있는지 나는 아직도 의심스럽습니다. 1)
이 책의 수록작인 〈로렐라이〉의 마지막 장면을 보세요. 듀나에게 있어서는 인간성의 상실조차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합니다.
하다못해 〈구부전〉의 시아버지가 뱀파이어가 된 스스로에게 납득할 만한 학설을 세우기 위해 주리파(主理派)에서 주기파(主氣派)로 전향하는 과정을 다룰 때조차 “내가 뱀파이어이니 뱀파이어에 유리한 철학 체계를 만들겠다” 같은 이기적이고 유치한 욕망과는 상관이 없 2) 는, 이지적인 사고의 흐름이었을 뿐이라고 묘사하지 않던가요?
김태환이 해설에 적은 바와 같이 “인간적인 것을 되찾아야 한다는 휴머니즘적 메시지는 듀나에게서 찾아볼 수 없” 3) 으며, “기계 문명을 자연과 우주의 거대한 변전 속에서 파악하는 듀나의 소설은 냉정한 어조로 SF적 상상력의 폭을 확장” 4) 할 뿐입니다.
확장.
듀나는 확장만 할 수 있다면 무엇 하나 개의치 않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듀나의 태도―《면세구역》의 뒤표지에 실린 홍보 문구처럼 ‘매정하고 기묘한’ 그 태도는,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를 만나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고 싶었던 저에게 있어 무척이나 동경할 수밖에 없는, 선구자의 무엇이었습니다.
*
저는 입시를 마치고 간신히 대학생이 된 뒤로 SF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주변에서는 그런 저를 한심하게 바라보곤 했습니다. 요즘과 달리 20년 전에는 SF에 대한 인식이 그렇게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친구에게 함께 SF를 써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가 비웃음을 산 적도 있지요. 교수로부터 “SF는 소설이 아니다”라고 질책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 친구나 교수님이나 다 저와 개인적으로 가까운 분들입니다만.
그분들이 SF를 낮춰 본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SF는 사람들의 실제 인생을 조명하지 않는다.”
이 주장은 여러 각도에서 반론이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래서 SF가 더 좋다고도 생각했으니까요. 제가 바라던 것은 처음부터 항상 같았으니까요.
바로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를 만나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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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학부와 석사 과정을 거치는 동안 글만 쓰지는 않았습니다. 서점을 돌아다니며 장르문학의 여러 고전을 찾아보고 도서전의 줄을 서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한 주에 영화를 적어도 세 편 이상 보았으며 영화제나 시사회 이벤트를 쫓아다니는 데에도 열심이었습니다. 의식적으로 한 일은 아니었지만 저는 은연중에 듀나를 본보기로 삼았던 것이지요.
아니, 애초에 한국에서 듀나의 발자취를 피하는 것부터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어떠한 문화적인 경험을 하더라도―특히나 장르적인 경험이라면―반드시 듀나의 편린을 만나게 되었으니까요. 듀나가 그려나간 궤적이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기준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좋은 참고가 되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저는 좀 더 싸구려 취향에 근본 없이 SF, 판타지, 호러 그리고 미스터리를 겉핥기로 접근하기는 했지만요. 그리고 이렇게 저만의 궤적을 그려나가는 과정은 곧 제가 쓴 SF에 녹아들어 갔습니다. 이 때문에 저의 잡탕스러운 장르적 경험은 엉망인 결과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잦았습니다. 그 바람에 “네가 쓴 것은 SF가 아니다”라는 비판도 자주 들었지만 저는 딱히 개의치 않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들 네 장르가 얽혀 있다는 게 아니라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상의 경험을 넘어서는 극단적인 체험 말이죠. 그 체험은 극단적인 이성과 극단적인 비이성의 영역에 놓여 있습니다. 극단적인 이성은 퍼즐 미스터리와 하드 SF, 극단적인 비이성은 호러와 판타지가 대표한다고 생각하면 편하겠지만 많은 경우 이들은 자연스럽게 공존합니다. 오히려 극단적일수록 함께 있는 경우가 많지요. 5)
듀나의 뒤에 숨어 저 자신을 변명하자면, 저는 비록 겉핥기에 잡탕스러운 취향이었을지언정 제가 겨냥하는 바는 항상 일관적이었습니다. SF는 제가 겨냥하는 것을 노리기 위한 도구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고 말입니다.
*
SF를 쓰면서 제 인간관계도 넓어졌습니다. 취향이 같은 친구들도 많이 만났으며 저와 뜻을 함께하는 동지들도 생겼습니다. 이곳저곳에서 SF와 관련된 행사나 수업을 찾아 들은 덕분이었습니다. 창작 합평이나 장르와 관련된 강의 그리고 저자와의 만남까지, 저는 온갖 곳을 돌아다녔고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제가 만난 사람들 대부분은 어떤 형태로든 듀나에게 영향을 받은 이들이었습니다. 〈수련의 아이들〉에서 수련의 위벽에 붙어 있는 아이들처럼은 아니어도, 우리 역시 듀나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듀나에게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상관없이 말이지요.
작업도 그럭저럭 잘 풀렸습니다.
지망생 시절을 8, 9년이나 보내기는 했지만, SF 작가로 데뷔도 했고 SF와 관련된 칼럼이나 영화 평론 등의 일거리도 생겼으니까요. 글쓰기는 항상 재밌었고요.
무엇보다 목표에 따른 성과도 있었습니다. SF 작가로 데뷔하면서 초자연적인 존재들과 몇 번 마주쳤던 것이지요. 고대의 기술을 빌려 태어난 초능력자나 M78 성운에서 온 외계인 그리고 영혼을 갖게 된 인공지능을 만나면서 제가 쓰는 SF의 지평도 넓어졌습니다.
그중에는 듀나의 작품 속에 나왔던 그 양반들이 아닌가 싶은 존재들도 있었습니다. 〈거울 너머로 건너가다〉의 바바야가 정글과 똑 닮은 환경의 행성에서 온 독립영화 배우나(요즘에는 유튜버로 전향하셨지만요) 〈각자의 시간 속에서〉의 의식 대통합을 마친 시간 침략자와 비슷한 존재를 피해 도망 다니는 시공 난민과 짧게나마 술자리를 가진 적도 있었으니까요.
이렇게 꾸준히 SF를 쓴 덕분이었을까요?
데뷔 5년 차가 되었을 무렵, 저는 공개 계정으로 유니코드로는 입력할 수 없는 문자로 적힌 메일을 받았습니다. 네. 바로 제가 원하던 대상이 보낸 메일이었습니다.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었지요.
(번역기를 돌리기는 했습니다만) 메일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성간 문명에서는 서로 간섭을 하지 않은 것이 대원칙이다. 하지만 당신처럼 저차원적인 지능을 가진 인간이 그렇게나 바란다면 뭐가 되었건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정도의 도움은 줄 수 있다. 당신이 정녕 그것을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네. 바로 제가 원하던 내용이었지요.
하지만 그 메일을 받은 순간, 글쎄… 제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이게 맞는지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당분간은 저차원적으로 해야 할 일이 몇 가지 있어서요. 제가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결국 저는 (사전을 몇 종류나 펼쳐보는 중역을 거친 끝에) 답 메일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는 알겠다고 답신을 주었고요. 휴. 바로 제가 원하던 대상이 제 코앞에 다가왔음에도 오히려 저의 방황이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데뷔를 준비하는 8년, 데뷔하고 나서 5년의 짧지 않은 세월을 바쳐가며 얻은 기회였는데도 말이지요.
저는 도대체 무엇이 두려웠을까요?
혹시 〈너네 아빠 어딨니?〉의 좀비가 된 아빠나 〈아이들은 모두 떠난다〉의 고치를 벗어난 아이들처럼 변해버릴까 봐 두려웠던 것은 아닐까요? 듀나의 작품 속에 나오는 정체성의 변이 중에는 인간을 초월하는 것이 아닌, 퇴락하거나 왜곡되는 경우도 있었으니까요.
저 또한 취재하는 도중 지성을 갖춘 대통령의 항문에게 물리거나 외계 침략자가 만든 놀이공원에 갇혀 인형 탈 중 하나가 될 뻔하거나 술자리에서 버림받은 곰 인형에게 붙잡힌 나머지 맛이 갈 정도로 취하기도 했고요. SF 작가로 살기란 이렇게나 험난하답니다.
어쨌든 일단 목표는 잠시 잊고 작업에만 몰두하기로 했습니다.
글쓰기는 언제나 재밌었거든요. 또 SF 작가는 생업이 되었고 칼럼에서 에세이로, 평론에서 연구로 일거리가 이어지기도 했지요. 만약 다른 마음을 먹었다 하더라도 마감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었을 거예요.
제가 이렇게 바닥을 긁건 말건 듀나는 계속해서 작품을 보고 글을 썼습니다. 듀나를 읽지 않았거나 무시했던 사람들도 〈스핑크스 아래서〉에 나왔던 모종의 단체처럼 부분 부분 비어 있는 한국의 SF 역사를 채우고자 자신의 과거와 추억에 적극적으로 듀나를 집어넣기 시작했고요. 반면 SF의 저변이 무척 넓어진 덕분인지, 아예 듀나의 영향을 받지 않은 작가들도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사이 저는 결혼도 하고 강의도 하러 다니다가, 아예 대학에 임용되어 학생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SF만 다루는 수업도 운영하고 1박 2일 TRPG 캠프도 진행하고 재밌게 지냈지요. 취향의 씨앗을 곳곳에 심고 뜻을 함께하는 동지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고나 할까요? 이렇게 SF를 쓰면서 제가 얻은 것이 무척 많아졌고, 그만큼 잃을 것도 많아지고 만 것이지요.
*
제가 겨냥하는 것을 노리기 위한 도구들은 하나같이 그 이상의 의미를 품게 되었습니다. 듀나의 표현을 약간 비틀어서 빌리자면, 주변의 차를 그냥 기계로 보지 못하고 사람이 타고 있는 탈것으로 보게 된 상황이었습니다.
설경구가 나오는 〈해결사〉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에서 살인 누명을 쓴 전직 형사로 나오는 설경구의 캐릭터는 고생 끝에 누명을 벗고 범인의 정체와 음모를 밝힌다. 이제 그는 그만해도 된다. 하지만 순전히 범인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는 엄청난 카체이스를 벌인다. 그러는 동안 재수 없게 소동에 말려든 수많은 자동차들은 날아가고 폭발한다.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그 차 안에 사건과 전혀 관계없는 무고한 사람들이 타고 있었고, 그 사람들이 사고로 죽거나 끔찍한 부상을 입었을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은 모양이다. 아무런 죄의식 없이 영화의 해피엔딩을 받아들이는 주인공이 그 증거다. 차 안에서 불타 죽어간 사람들은 그저 멋진 카체이스의 장식에 불과했던 거다. 6)
듀나가 지적한 바와 같이 사람을 장식으로 보았던 제가 사람을 사람으로 보게 된 뒤로부터는 저 자신을 지키지 못한 채 타자의 개입을 경험하게 되었고, 이는 제가 바라 마지않던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를 만나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일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으로 이어졌습니다. 어떤 존재의 개입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나의 감정이 사라진다면, 내가 원하지 않는 사랑을 갖게 된다면 그런 잡탕스러운 변화가 곧 나의 변화라고 해도 될 무엇일까요? 이제까지 열심히 SF를 써온 보람도 없이, 저는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도 모르고 그저 헤매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좀 더 진지하게 원점부터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란 무엇인지부터 고민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바이러스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과거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돈이 얼마나 많고 권력이 아무리 강하더라도―오히려 그런 사람일수록―코로나의 영향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네,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변종 생명체가 나타나 인간을 시체로 바꿔버리는 세상이 열린 것입니다.
우연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저는 이것 또한 운명이라고 느꼈습니다. 서점이 아닌 온라인으로 책을 주문했고 도서전은 비대면으로만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구독하는 OTT 서비스는 어느새 다섯 군데가 넘었으며 영화제나 시사회 이벤트는 후기만 찾아보았습니다. 오로지 집에 앉아서 글만 쓰며 지내게 되었지요.
*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변종 생명체가 나타나 인간을 시체로 바꿔버리는 세계.
제가 바라던 것이 아주 일그러진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이제껏 SF가 그려왔던 이미지가 일상이 되고 만 것이지요. 좀비 영화처럼 백신과 의약품이 동이 났고 디스토피아 소설처럼 지하철의 요금 계산기는 카드를 찍을 때마다 마스크를 쓰고 지하철을 타라는 경고문을 읊었으며 미래에서 온 안드로이드가 주인공을 가르치는 학습 만화처럼 모든 수업은 화상으로 진행해야만 했습니다. 적지 않은 SF 작가들이 이런 상황에 대비한 전문가 취급을 받으며 쏟아지는 인터뷰에 얼떨떨하게 대답해야 했고요. 이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주장을 공유합니다.
“SF야말로 사람들의 실제 인생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분들이 말하는 SF가 제각기 다 다른 내용이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저는 뭐 어떤 의견이든 재밌게 들었습니다. 교수가 되어서 “SF 소설을 가르칩니다”라고 소개를 해도 어색하지 않게 되었고요. SF를 써보면 어떻겠냐는 저의 제안을 비웃던 친구도 이제는 SF를 쓰고 있습니다. 20년 전과 달리 요즘에는 SF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달라진 덕분이지요. 저는 그런 주변의 모습이 신기합니다. 대학 입시와 데뷔를 위해 SF를 공부하는 학생들을 보며 지내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요.
*
그리고 이러한 저의 고민, 《장르 세계를 떠도는 듀나의 탐사기》의 뒤표지에 실린 홍보 문구를 빌리자면 “거기 계신 분들! 안개 저편에서 꿈틀거리는 뭔가가 보이나요?”라는 질문에 대한 그 고민은, 얼마 전 듀나의 단편집을 읽은 제 아내가 지나가듯이 남긴 짧은 인상비평에 의해 정리되고 말았습니다.
“SF 작가들은, 그러니까 듀나는 참 긍정적이지 싶어.”
긍정.
듀나가 “매정하고 기묘”하다거나 “냉정한 어조로 SF적 상상력의 폭을 확장”해 왔다는 기존의 평가는 그조차도 인간중심주의적인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의 편견이었을 뿐, 아내가 말한 바와 같이 듀나는 그 누구보다 긍정적인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이를테면 〈미래관리부〉에서 시간 여행을 통한 후손들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목도하는 주인공이 현생인류의 유전자와 시스템, 개인의 의지가 모두 후손들에 의해 좌지우지될 것을 예상하면서도, 미래가 어떻게 예정되어 있건 아직은 자신만의 쾌락과 욕망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긍정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듀나에게 있어서 인간성의 상실조차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할지언정, 그 긍정에는 분명한 방향성이 있습니다. 《구부전》에 수록된 〈추억충〉의 마지막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추억충〉은 듀나가 정체성의 변이를 대하는 태도를 무척이나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그리고 듀나가 정체성의 변이에 대해 이 작품에서, 나아가 그의 작품 전반에서 보여주는 태도는 매정이나 냉정으로 읽힐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이는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매몰찬 거절이나 가혹한 비판이라기보다는, 편협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서 보다 더 많은 것과 보다 더 다른 것을 사랑할 가능성을 긍정하고 전향적으로 기대하고자 함이라 보는 편이, 가능한 꿈의 영역을 탐구하고자 하는 기개라 보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니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를 만나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고 싶을 뿐이었던 저에게, 듀나는 오독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듀나는 논리적 일관성 속에서 취향에 대해 항상 강조하면서 또 상상력의 부재가 가져올 종말을 이야기해 왔는데도 말이에요. 〈첼로〉에서 ‘이모’가 로맨스의 핵심이 비이성에 있고 이 쓸데없는 유아론만 극복하면 된다며 ‘트린’에 대한 사랑을 설파하는 장면이나 〈사춘기여, 안녕〉에서 사람들이 여전히 연우의 아버지가 쓴 시나리오를 찾는다는 설정처럼요.
듀나는 적지 않은 작품 속에서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정체성의 변이가 어떤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다양하게 그려왔으며, 그 이상으로 취향과 사랑에 대한 품위 있는 고집을 지켜오지 않았습니까?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에 대한 저의 집착으로 인해 이제껏 의식도 못 했던 것입니다. 듀나의 작품에서 단지 그다울 뿐인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요.
아무리 듀나가 여러 면에서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를 만나 인간을 초월하게 되었거나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 같은 작가인 것은 맞다고는 하더라도 말이에요. 감사하게도, 이번 역시 아내의 도움을 받은 뒤에야 제대로 된 독해를 해낼 수 있었습니다.
*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는 제가 그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품위 있게 저를 기다려주었습니다. 저는 일단 제가 다른 이에게 도움을 받기 전에 주변의 사랑해야 할 사람들부터 사랑하는 것이 최선이지 않겠느냐며 답장을 보냈어요.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도 저의 의견에 동의를 해주었고요. 앞으로 제가 잘 해낼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지만요.
여기서부터는 그저 에밋 브라운의 격려에 기대야겠지요.
그래서 요즘에는 학생들과 여러 SF 작품을 골라서 읽고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학생들도 제가 좋아하는 작품들을 읽고 즐거워하더군요. 그것 말고도 아내와 저속 노화 식단도 같이 만들어서 먹는다거나 강아지와 고양이의 생활 습관에 대한 유튜브를 본다거나 시간이 나면 짧게나마 강변을 산책한 다음에 수업을 준비한다거나 하고 있답니다.
맥락 없이 쓴 이야기였습니다만,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고 인류를 지켜보는 외계 생명체를 만나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고 싶었던 제가 듀나의 작품 속에서 나타나는 정체성 변이 테마에 관하여 고민하며 얻은 교훈에 대한 정리는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SF 작가 홍지운, 정확히 말해 듀나가 〈셰익스피어의 숲〉에서 저자와 비슷하게 행동하도록 설계했던 소설 속 화자를 따라 만든 소설 속 화자 홍지운이었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석
1) 듀나, 〈로렐라이〉, 《면세구역》, 북스토리, 2013년, 286쪽.
2) 듀나, 〈구부전〉, 《구부전》, 알마, 2019년, 52쪽.
3) 김태환, 〈해설-인간과 기계〉, 《태평양 횡단 특급》, 문학과지성사, 2002년, 307쪽.
4) 위의 책, 308쪽.
5) 듀나, 《장르 세계를 떠도는 듀나의 탐사기》, 우리학교, 2019년, 76쪽.
6) 듀나, 《가능한 꿈의 공간들》, 씨네21북스, 2015년, 82~83쪽.
7) 듀나, 〈추억충〉, 《구부전》, 알마, 2019년, 1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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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운
본명 홍석인. 공상연애소설가. 청강대 웹소설창작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