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중 세계는 이미 기술 특이점을 돌파했다. 물리적인 죽음이 반드시 실존적 죽음으로 연결되지 않으며, 영원히 살고자 한다면 살 수 있고, 가상의 존재라고 해도 나라 하나를 이룩할 수 있을 만큼 현실과 비교해 물질적·기술적 한계로부터 자유롭다. 초지능인 ‘마더’들은 전능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세계는 여전히 불완전하고 고통스럽다. 에너지는 소행성대에 도달할 만큼은 충분하지 않고, 마더들은 인간의 고통에 무관심하며, 인간은 영원에 적응하지 못했다. ‘아르카디아’와 다른 두 개의 양로원이 지옥인 것처럼 세계도 지옥이다. 주인공인 ‘배승예’는 이 지옥의 희생자로, 사고로 인해 몸의 대부분을 잃고 아르카디아에 오게 된다. 그리고 배승예에게 아르카디아는 익숙한 곳이다.
소행성 이전의 가상공간인 아르카디아는, 실재하지 않는다는 걸 차치하더라도 이상한 공간이다. 이곳에서 ‘사는’ 사람은 없다. 마더에 흡수되기 위해 오는 이용자, 그런 이용자를 구경하기 위해 오는 관광객, 그리고 그런 이용자와 관광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용된 개별자들뿐이다. 이용자에게 아르카디아는 양로원이고, 관광객에겐 관광지이며, 개별자들에겐 일터에 불과하다. 아르카디아에서 진정 주민으로 살았던 이는 어릴 적에 이용자인 할머니를 따라온 주인공 배승예뿐이다.
‘아르카디아’라는 명칭은 그리스인들의 낙원을 뜻한다. 하지만 배승예에게 아르카디아는 지옥 같은 공간으로 기억된다. 아르카디아는 양로원 이용자가 마더에 흡수되는 과정을 우스꽝스럽게 보여주고, 그 흡수는 관광객들에게는 구경거리에 불과하다. 소멸하기 위해 양로원을 찾은 할머니를 지켜본 배승예는 과장되어 있기에 더 끔찍한 종류의 상실을 겪는다. 이후 배승예는 아르카디아를 떠났다가, 죽음에 가까운 사고를 겪은 뒤, 다시 아르카디아로 돌아온다. 이런 회귀는 이상하지 않다. 아르카디아는 최단거리로 가기 위해 때로 반대쪽으로 가야 하는, 끝과 끝이 맞붙은 공간이다. 배승예는 아르카디아 사람이기 때문에 죽음을 통해 돌아와 자신의 기원을 탐색하게 된다.
기원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배승예는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복잡한 존재라는 것을, 기존에 알던 자신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마더들은 ‘멜리쥔’으로 대표되는 내부 우주에서 비롯되는 외계인의 침공을 주시하고 있으며, 우주 연방군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의 적과 싸우고 있다. 배승예는 그런 와중에 조작된 과거를 가지고 만들어진 아이였고, 배승예 자신도 알지 못하는 키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진실에 도달하기까지 배승예를 도운 것은 ‘라다 문’이라는 배승예의 베이비시터다.
라다 문은 게임 캐릭터였고, 수많은 퍼블릭 도메인과 양로원 이용자들을 조합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직조하는 마더에게 고용된 존재다. 배승예는 라다 문과 그의 동료들을 만날 때 혹시 자기가 라다 문이 주인공인 게임 속에 들어온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이런 의심이야말로 배승예를 비롯한 동료들의 무기다. 게임 속 캐릭터로 만들어져 자신의 역할에 맞는, 완벽한 천국 같은 세계에서 살다가 무의미하고 재미없는, 지옥 같은 게임 밖으로 떠밀려 난 이 캐릭터들은 서로 다른 방법으로 끝없이 음모론을 만들고, 그 음모론이 진짜인지 아닌지 증명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어느 정도 진실을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 문제는 게임과 다르게 현실에선 애초에 답이 정해져 있지 않으며,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반면, 멜리쥔은 하나의 진실을 추구한다. 서로 다른 스물세 개의 멜리쥔 역사를 규합하려는 그 시도는 마더의 양로원들은 물론이고 세계까지 위협할 정도다. 하지만 서사학적으로 볼 때 그런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각자의 진실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서사라고 한다. 하나의 진실이 사실에서 비롯되는 이 위기는 서사로써 극복된다. 양로원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찾던 배승예는 모험 끝에 양로원의 시간을 되돌리는 데 성공한다. 그러자 멜리쥔들은 사라지고, 양로원은 안정을 되찾으며, 배승예와 동료들은 살아남는다. 가상공간이기 때문에 시간을 되돌릴 수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이야기 속 사건들은 이야기하는 주체의 뜻대로 뒤바뀌기 마련이다.
작중 많은 인물이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 속 이야기에서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수사법이고, 그것을 믿게끔 하기 위해서 말해진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수많은 의심과 음모론을 내세우며 곁다리를 뻗는다. 아르카디아의 시장에 의해 고발되듯, 해체된 이야기들은 배승예를 둘러싼 음모들을 잔뜩 쏟아낸다.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은 불안과 불편함을 준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게 한다. 바로 그것이 아르카디아의 가장 큰 음모다.
작가는 작품에서 모든 가능성을 뻗어나가며 불필요해 보일 정도로 집요하게 가지를 친다. 맥시멀리즘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다. 이 집요함의 일부는 ‘너무 순문학스럽게 쓰시지 않아도 돼요’라는 현대문학 편집자의 말을 듣고 ‘더 장르스러운 이야기를 쓰고 싶어’진 작가가 ‘SF하면 떠올리는 가장 진부한 재료들을 모두 모아 단지에 담’았기 때문인 것 같다. (* 듀나,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었다》, 현대문학, 201~202쪽 작가의 말.)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 같은 이야기와 계속해서 뒤집히는 사실들은 원초적인 즐거움을 준다. 게다가 진실은 분명 어딘가에 있을 테고, 계속 좇아간다면 멜리쥔이 바라듯 그 끝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낙원으로 가는 길이 아니다.
다들 알다시피 유토피아는 없고, 꿈을 꿀 때나 그 가치를 갖는 법이다. 그리스인들의 실재 아르카디아 또한 그저 양치기들이 많은 목가적인 땅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낙원은 이야기되고 나서 비로소 생기지 이야기 안에서는 알 수 없다.
무엇보다 장르는 장르적 요소를 쏟아부은 혼돈이 아니다. 장르는 구분 지어질 때 나타난다. 《천일야화》와 같은 끝없는 이야기는 모든 이야기의 개성을 반영해 역설적으로 몰개성하다. 아르카디아를 둘러싼 수많은 음모도 장르로 구분 지어질 수 없는 상태다. 불분명한 것은 불안하다. 이 불안은 죽음도 영원한 삶도 받아들이지 못한 양로원 이용자들의 불안이고, 라다 문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이 느끼는 역할 잃은 이의 불안이며, 자신이 진짜라고 주장하고만 싶은 서로 다른 멜리진 문명의 불안이자, 그 근거 자체가 불확실한 그림자의 불안이기도 하다.
아르카디아의 아이인 배승예는 당연히 그 불안을 알기에, 다시 한번 아르카디아를 떠난다. 이제 배승예는 혼란한 자신의 유년기와 내부 우주에서 온 외계인의 침략과,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없는 음모론의 그물망에서 빠져나와 영토를 조정하는 자신의 직무대로 스스로의 존재를 아르카디아로부터 구분 짓는다. 이제 아르카디아는 이야기 속의 장소가 되고, 배승예는 이야기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불안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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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래
네이버 오늘의 문학에 〈미궁에는 괴물이〉를 게재하며 첫 고료를 받았다. 소설집 《백관의 왕이 이르니》와 웹소설 《슬기로운 문명생활》, 경장편 《허깨비 신이 돌아오도다》를 썼다.
작중 세계는 이미 기술 특이점을 돌파했다. 물리적인 죽음이 반드시 실존적 죽음으로 연결되지 않으며, 영원히 살고자 한다면 살 수 있고, 가상의 존재라고 해도 나라 하나를 이룩할 수 있을 만큼 현실과 비교해 물질적·기술적 한계로부터 자유롭다. 초지능인 ‘마더’들은 전능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세계는 여전히 불완전하고 고통스럽다. 에너지는 소행성대에 도달할 만큼은 충분하지 않고, 마더들은 인간의 고통에 무관심하며, 인간은 영원에 적응하지 못했다. ‘아르카디아’와 다른 두 개의 양로원이 지옥인 것처럼 세계도 지옥이다. 주인공인 ‘배승예’는 이 지옥의 희생자로, 사고로 인해 몸의 대부분을 잃고 아르카디아에 오게 된다. 그리고 배승예에게 아르카디아는 익숙한 곳이다.
소행성 이전의 가상공간인 아르카디아는, 실재하지 않는다는 걸 차치하더라도 이상한 공간이다. 이곳에서 ‘사는’ 사람은 없다. 마더에 흡수되기 위해 오는 이용자, 그런 이용자를 구경하기 위해 오는 관광객, 그리고 그런 이용자와 관광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용된 개별자들뿐이다. 이용자에게 아르카디아는 양로원이고, 관광객에겐 관광지이며, 개별자들에겐 일터에 불과하다. 아르카디아에서 진정 주민으로 살았던 이는 어릴 적에 이용자인 할머니를 따라온 주인공 배승예뿐이다.
‘아르카디아’라는 명칭은 그리스인들의 낙원을 뜻한다. 하지만 배승예에게 아르카디아는 지옥 같은 공간으로 기억된다. 아르카디아는 양로원 이용자가 마더에 흡수되는 과정을 우스꽝스럽게 보여주고, 그 흡수는 관광객들에게는 구경거리에 불과하다. 소멸하기 위해 양로원을 찾은 할머니를 지켜본 배승예는 과장되어 있기에 더 끔찍한 종류의 상실을 겪는다. 이후 배승예는 아르카디아를 떠났다가, 죽음에 가까운 사고를 겪은 뒤, 다시 아르카디아로 돌아온다. 이런 회귀는 이상하지 않다. 아르카디아는 최단거리로 가기 위해 때로 반대쪽으로 가야 하는, 끝과 끝이 맞붙은 공간이다. 배승예는 아르카디아 사람이기 때문에 죽음을 통해 돌아와 자신의 기원을 탐색하게 된다.
기원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배승예는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복잡한 존재라는 것을, 기존에 알던 자신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마더들은 ‘멜리쥔’으로 대표되는 내부 우주에서 비롯되는 외계인의 침공을 주시하고 있으며, 우주 연방군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의 적과 싸우고 있다. 배승예는 그런 와중에 조작된 과거를 가지고 만들어진 아이였고, 배승예 자신도 알지 못하는 키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진실에 도달하기까지 배승예를 도운 것은 ‘라다 문’이라는 배승예의 베이비시터다.
라다 문은 게임 캐릭터였고, 수많은 퍼블릭 도메인과 양로원 이용자들을 조합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직조하는 마더에게 고용된 존재다. 배승예는 라다 문과 그의 동료들을 만날 때 혹시 자기가 라다 문이 주인공인 게임 속에 들어온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이런 의심이야말로 배승예를 비롯한 동료들의 무기다. 게임 속 캐릭터로 만들어져 자신의 역할에 맞는, 완벽한 천국 같은 세계에서 살다가 무의미하고 재미없는, 지옥 같은 게임 밖으로 떠밀려 난 이 캐릭터들은 서로 다른 방법으로 끝없이 음모론을 만들고, 그 음모론이 진짜인지 아닌지 증명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어느 정도 진실을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 문제는 게임과 다르게 현실에선 애초에 답이 정해져 있지 않으며,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반면, 멜리쥔은 하나의 진실을 추구한다. 서로 다른 스물세 개의 멜리쥔 역사를 규합하려는 그 시도는 마더의 양로원들은 물론이고 세계까지 위협할 정도다. 하지만 서사학적으로 볼 때 그런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각자의 진실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서사라고 한다. 하나의 진실이 사실에서 비롯되는 이 위기는 서사로써 극복된다. 양로원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찾던 배승예는 모험 끝에 양로원의 시간을 되돌리는 데 성공한다. 그러자 멜리쥔들은 사라지고, 양로원은 안정을 되찾으며, 배승예와 동료들은 살아남는다. 가상공간이기 때문에 시간을 되돌릴 수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이야기 속 사건들은 이야기하는 주체의 뜻대로 뒤바뀌기 마련이다.
작중 많은 인물이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 속 이야기에서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수사법이고, 그것을 믿게끔 하기 위해서 말해진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수많은 의심과 음모론을 내세우며 곁다리를 뻗는다. 아르카디아의 시장에 의해 고발되듯, 해체된 이야기들은 배승예를 둘러싼 음모들을 잔뜩 쏟아낸다.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은 불안과 불편함을 준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게 한다. 바로 그것이 아르카디아의 가장 큰 음모다.
작가는 작품에서 모든 가능성을 뻗어나가며 불필요해 보일 정도로 집요하게 가지를 친다. 맥시멀리즘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다. 이 집요함의 일부는 ‘너무 순문학스럽게 쓰시지 않아도 돼요’라는 현대문학 편집자의 말을 듣고 ‘더 장르스러운 이야기를 쓰고 싶어’진 작가가 ‘SF하면 떠올리는 가장 진부한 재료들을 모두 모아 단지에 담’았기 때문인 것 같다. (* 듀나,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었다》, 현대문학, 201~202쪽 작가의 말.)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 같은 이야기와 계속해서 뒤집히는 사실들은 원초적인 즐거움을 준다. 게다가 진실은 분명 어딘가에 있을 테고, 계속 좇아간다면 멜리쥔이 바라듯 그 끝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낙원으로 가는 길이 아니다.
다들 알다시피 유토피아는 없고, 꿈을 꿀 때나 그 가치를 갖는 법이다. 그리스인들의 실재 아르카디아 또한 그저 양치기들이 많은 목가적인 땅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낙원은 이야기되고 나서 비로소 생기지 이야기 안에서는 알 수 없다.
무엇보다 장르는 장르적 요소를 쏟아부은 혼돈이 아니다. 장르는 구분 지어질 때 나타난다. 《천일야화》와 같은 끝없는 이야기는 모든 이야기의 개성을 반영해 역설적으로 몰개성하다. 아르카디아를 둘러싼 수많은 음모도 장르로 구분 지어질 수 없는 상태다. 불분명한 것은 불안하다. 이 불안은 죽음도 영원한 삶도 받아들이지 못한 양로원 이용자들의 불안이고, 라다 문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이 느끼는 역할 잃은 이의 불안이며, 자신이 진짜라고 주장하고만 싶은 서로 다른 멜리진 문명의 불안이자, 그 근거 자체가 불확실한 그림자의 불안이기도 하다.
아르카디아의 아이인 배승예는 당연히 그 불안을 알기에, 다시 한번 아르카디아를 떠난다. 이제 배승예는 혼란한 자신의 유년기와 내부 우주에서 온 외계인의 침략과,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없는 음모론의 그물망에서 빠져나와 영토를 조정하는 자신의 직무대로 스스로의 존재를 아르카디아로부터 구분 짓는다. 이제 아르카디아는 이야기 속의 장소가 되고, 배승예는 이야기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불안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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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오늘의 문학에 〈미궁에는 괴물이〉를 게재하며 첫 고료를 받았다. 소설집 《백관의 왕이 이르니》와 웹소설 《슬기로운 문명생활》, 경장편 《허깨비 신이 돌아오도다》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