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2년 조선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 현재 약 120세의 한 여성. 20대나 30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외양이다. 몰락한 양반의 딸인 그는 어린 시절 무능하고 가난한 아버지와 곤궁하게 살다가 아버지 장례가 끝난 뒤 어느 양반집의 ‘동네 바보’ 아들에게 ‘시집을 간다’(시부모가 사는 집으로 들어간다는 이 표현의 전근대성이 시아버지(舅)와 며느리(婦)의 관계를 표현하는 본 이야기와 어울릴 듯하여 ‘시집을 간다’라는 구습어를 현대어로 번안하지 않았다). 바보 남편이 결혼 8개월 만에 사고로 죽은 뒤 청상과부가 되는데, 정작 그는 ‘독수공방이야말로 자신만의 방을 가졌다는 뜻’이라며 버지니아 울프처럼 기뻐한다. 서지나 총류 구분 없이 집에 있는 책을 닥치는 대로 읽고, 소리꾼에게 정신이 팔리고, 그림을 그리는 등 문화적 풍류를 영위하던 어느 날, 병든 시아버지의 약으로 쓰기 위해 조달된 기이한 뿌리의 수액을 몰래 맛보곤 죽다 살아난다. 시아버지는 사망하고, 집안은 불편하고 부조리한 삼년상 의례에 들어가는데, 이때 시아버지의 시체가 관을 뚫고 땅을 헤치고 무덤에서 뛰쳐나와 대문을 두드린다. 무덤 곁을 지켰을 세 아들의 피를 흡혈한 뒤 귀가한 시아버지는 “이리 오너라” 하는 호령에 불려 온 집안의 종들을 물어뜯어 살육하고 가족들을 감염시킨다. 그리고 해가 뜨자 거적을 뒤집어쓰고 그늘 속에 숨는다.
잠깐, 이쯤에서 넷플릭스의 한국식 사극 좀비물을 떠올린 사람은 필자만이 아니리라. 본 작품이 2005년 《미스테리아》에 처음 실렸고 원래는 영화 시나리오로도 썼었다는 작가의 말을 확인한 뒤 필자는 외쳤다.
‘뭐야, 〈구부전〉이 먼저잖아!’
〈구부전〉을 읽고 난 뒤 해당 드라마의 제작기를 열심히 검색해 보았다. 필자의 검색 능력이 부족해서인지 듀나의 이야기가 있었기에 이후의 기획도 가능했다는 고백은 찾을 수 없었다. 이야기의 원천인 창작자와 그의 아이디어에 대한 찬사는 알아보는 사람들이 외쳐야 할 밖에. 그 이야기 이전에 듀나가 있었다, 라고 말이다.
아무튼, 변질된 시아버지의 상태는 19세기 후반 당시 조선의 누구도 제대로 진단할 수 없었으나, 화자는 서양 사람들에게서 명쾌한 용어를 빌려 ‘뱀파이어’라고 묘사한다. 조선의 뱀파이어는 백작이나 군주와도 유사한 계급적 지위를 가졌으니 서양의 개념과 유사할지 모르나, 피와 살을 탐하며 부풀어 오른 배는 좀비를 연상시키고, 자신이 어떻게 변했든 양반으로서 힘을 행사하려 애쓰는 모습은 조선의 꼰대들 그 자체다. 이미 죽은 존재, 한번 죽었으니 사라져야 할 존재, 진즉 죽었는데도 죽은 줄도 모르는 존재, 그래서 죽었음에도 죽지 않는 존재, 바로 조선의 잘난 ‘양반들’이다.
시아버지가 자기 식솔들의 피로 갈증을 채우고 며느리와 자식들도 독을 주입당해 2차 뱀파이어가 된 후, 이 양반들은 허기를 잠재우지 못하고 마을 밖 사람들을 사냥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면역력 덕분에 이들의 먹이가 되지 않았던 화자는 외지 사람을 집 안으로 불러들이며 뱀파이어 일가의 조력자로 일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화자는 남장을 하고 자유롭게 살아간다. 좋아하는 음악을 즐기며 기방에서 노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뿌리 수액 때문인지 완력마저 증강했고, 제법 안전해진 뒤로는 남자들만의 것이었던 온갖 특권도 누린다. 점점 더 능청스럽고 대범해진 화자는 급기야 죄를 즐기며 살육의 공범이 되어간다.
이 와중에도 시아버지는 책상에 앉아 책을 읽는데, 이전에 고수하던 자신의 이론과 정반대의 세계관을 끌어와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한다. 그는 정적들을 먹이로 공급받으면서 뱀파이어 아래 인간을 두는 새로운 계급 체계를 꿈꾸기 시작한다.
시아버지는 나라를 뒤엎어 이상적인 뱀파이어 국가를 만들 생각을 하고, 화자는 시아버지를 통해 조선의 가치와 문화가 세계를 정복할 가능성을 점친다. 이 시점에 지극히 사소하면서도 특출난 화자의 재능이 드러난다. 시아버지와 조선의 운명이 화자의 손에 걸리는 의외의 전개가 펼쳐지는데……. 이야기의 결말이 궁금하다면 제목에서 힌트를 찾아봐도 좋다. 제목 〈구부전〉의 음절을 살펴보면 ‘구(舅)’는 시아버지를 뜻하고, ‘부(婦)’는 여기서는 며느리를 말한다. 이 이야기는 둘 사이에 일어난, 단순히 ‘전해진 이야기(傳)’가 아니다. 둘 사이에 일어난 ‘전쟁(戰)’이다. 더 확실한 결말은 직접 읽어보고 확인할 수 있다.
다 읽고 보니 이 증언을 하는 여성의 얼굴이 복합적으로 그려진다. 그는 20대나 30대로밖에 보이지 않을 앳된 얼굴로 아무도 믿지 못할 이야기를 증언하고 있다. 그는 아마도 영어나 광둥어, 혹은 자신의 모국어가 아닌 것이 확실하나 30년은 현지에 살았을 법한 유창한 제2외국어로 이 이야기를 전했을 것이다. 그는 조선어를 이미 잊었고 이제는 단어조차 잘 떠올리지 못하지만, 자신이 기억하는 조선의 이야기를 상대가 알기 쉬운 맥락에서 전달할 수 있을 정도로 각국의 문화에 조예가 깊다. 이 설정을 알고 읽으면 작가가 화자의 증언을 청취해 번역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화자는 평생에 걸쳐 글과 음악과 그림만큼 자신을 사로잡은 것을 알지 못한다. 그중에서도 어쩌면 당대 가장 유치하고 천하고 저급하다고 여겨지는 것, 그래서 고급스러운 것만을 향유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들을 섭렵하고 통달해 간다. 그리고 이를 흡수해 온 자신의 저력이 야만의 시대를 통과한 순간, 자신을 살게 했음을 안다. 죽어 마땅한 자들이 죽었다 깨어나도 해독하지 못하고 이해하려 하지 않는 것들을 화자만은 알고 있다. 그것이 그의 자부다.
동시에 그 한복판에 있었기에 화자는 공범이자 도피자이기도 하다. 이제는 그 역시 죽지 못하는 삶을 끌어안고 산다. 모두가 거짓말로 여길 이야기를 담담히 전하는, 화자의 복잡다단한 얼굴을 떠올리면 급기야 화자가 듀나 같다는 생각에 이른다. 초월한 자만이 유한한 한때를 말하리니. 그가 자생한 게 경이롭달까. 듀나는 초월한 자 같다. 듀나의 30년 저작을 엿보다 보면 타임머신을 탄 듯한 묘한 기분이 든다.
〈시사IN〉에 실린 인터뷰를 살펴보니, 작가는 현실과 적정한 거리를 두고 작품을 집필한다고 한다. “지금 여기에서 제가 경험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씁니다. 그런데 이렇게 쓰다 보면 제가 그렇게 벗어나려는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게 됩니다.” 그는 “그냥 도피를 위해 써요”라고 말하지만 “이야기하지 않음으로써” 현실을 이야기한다. (김영화 기자, “30년 차 ‘토끼 작가’ 듀나는 말한다, 절망하지 말자고”, 〈시사IN〉, 2024년 3월 8일.) 그의 작품은 독자에게 현실에 충분히 절망하는 게 낫다고 말하는 듯하지만, 한편으로 현실을 관조하며 절망을 유보하도록 한다. 독자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자의 증언처럼 그의 이야기를 받아안게 된다.
먼 미래를 말하듯 듀나의 궤적을 응시하며
본 작품 〈구부전〉이 출간된 것도 어언 20년 전이다. 지금보다 훨씬 절망적인 문화적 폐쇄성과 편협성이 한국 사회를 지배했던 때에 이 작품이 발표되었다는 것이 새삼 놀랍다. 듀나는 얼마만큼의 시간을 뛰어넘으며 이야기에 천착해 왔을까. 내가 기억하기로 20~30년 전 한국은 뱀파이어 시아버지가 자기가 죽은 줄도 모르고 호통치는 조선 시대와 다를 바 없었다. 아니, 차별을 금지하자는 말에 질색하는 사람들이 엄연히 존재하는 지금도 마찬가지고, 여자와 약자, 동물들이 삶을 속수무책으로 빼앗기는 한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다. 삶이 쉽게 비관적 전망으로 기울 때 ‘현실은 이야기가 아니니까’ 하는 체념이 싹튼다. 제약 속에 자신을 구겨 넣고 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포기는 일상이 된다. 푸념과 단념은 내면화된다. 그럴 때 일찌감치 다른 세계를 향해 달려나간 듀나의 작품들은 현재에 발목 잡힌 채 머무르고 있는 우리의 안일함을 비웃는 듯하다.
특히, 답답한 세계를 먼 과거로 밀어버리고 다른 세계를 소환해 쾌감을 선사하려는 한국의 장르 창작자에게 듀나는 영원한 자극이자 지향이 아닐까 싶다.
SF가 매니악한 장르라는 이야기를 들을 일이 없을 정도로 국내 SF가 비약적으로 성장한 요즘, 창작자들은 듀나의 활동의 수혜자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그가 없던 길을 만들었다는 의미 이상이다. 내가 만약 30년 전에 활동했다면 듀나처럼 지속할 수 있었을까? 말은 쉽지만 결단과 시행은 쉽지 않다. 하지만 듀나를 통해 마치 시간 여행으로 미래를 아는 것처럼, 알고 보는 영화의 결말처럼 우리는 다양한 상상력을 향유하고 있다. 아무도 정하지 않았지만, 그가 결단한 길에 우리가 있다.
답 없는 세계를 유령처럼 떠도는 게 비루한 현실인가 싶을 때, 이미 전제에 의문을 던지며 세계를 뒤엎는 실험들이 있어왔다는 것은 갑갑증에 걸린 독자들의 숨통을 다소 터준다. 위계적이고 편협한 전체주의, 협소한 공동체주의가 강고한 한국 사회에 장르적 문법으로 진즉 반기를 든 사람이 있었음에 위로를 받는다.
듀나를 읽고 난 뒤 나와 독자들은 세계를 다른 각도에서 보게 된다. 어쩌면 이미 죽은 사조들이 호통치는 이 현실도 후반부 전복을 위한 훌륭한 빌드업일지 모른다는 가슴 뛰는 상상을 하게 된다. 그저 지금 아둔하게 읽고 노래하는 것이 자신을 지키고 세계를 바꿀 가장 날카로운 무기라 믿어본다. 그것이 동시대 독자들이 듀나에게 받은 선물이다. 듀나의 이야기는 풍화에 낡지 않는 플래티넘 재질처럼 영속해 존재감을 빛낼 테다. 세상이 과연 달라질까, 의심이 드는 순간이야말로 그의 이야기를 곁에 둘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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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모과
단편집 《밤의 얼굴들》, 중편소설 《클락워크 도깨비》 《10초는 영원히》 《노바디 인 더 미러》, 장편소설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 《서브플롯》 《말 없는 자들의 목소리》 《그린 레터(근간)》 등을 출간했다. 2019년 한국과학문학상, 2021년 SF어워드, 2022년 양성평등문화상 신진여성문화인상을 수상했다.
1842년 조선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 현재 약 120세의 한 여성. 20대나 30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외양이다. 몰락한 양반의 딸인 그는 어린 시절 무능하고 가난한 아버지와 곤궁하게 살다가 아버지 장례가 끝난 뒤 어느 양반집의 ‘동네 바보’ 아들에게 ‘시집을 간다’(시부모가 사는 집으로 들어간다는 이 표현의 전근대성이 시아버지(舅)와 며느리(婦)의 관계를 표현하는 본 이야기와 어울릴 듯하여 ‘시집을 간다’라는 구습어를 현대어로 번안하지 않았다). 바보 남편이 결혼 8개월 만에 사고로 죽은 뒤 청상과부가 되는데, 정작 그는 ‘독수공방이야말로 자신만의 방을 가졌다는 뜻’이라며 버지니아 울프처럼 기뻐한다. 서지나 총류 구분 없이 집에 있는 책을 닥치는 대로 읽고, 소리꾼에게 정신이 팔리고, 그림을 그리는 등 문화적 풍류를 영위하던 어느 날, 병든 시아버지의 약으로 쓰기 위해 조달된 기이한 뿌리의 수액을 몰래 맛보곤 죽다 살아난다. 시아버지는 사망하고, 집안은 불편하고 부조리한 삼년상 의례에 들어가는데, 이때 시아버지의 시체가 관을 뚫고 땅을 헤치고 무덤에서 뛰쳐나와 대문을 두드린다. 무덤 곁을 지켰을 세 아들의 피를 흡혈한 뒤 귀가한 시아버지는 “이리 오너라” 하는 호령에 불려 온 집안의 종들을 물어뜯어 살육하고 가족들을 감염시킨다. 그리고 해가 뜨자 거적을 뒤집어쓰고 그늘 속에 숨는다.
잠깐, 이쯤에서 넷플릭스의 한국식 사극 좀비물을 떠올린 사람은 필자만이 아니리라. 본 작품이 2005년 《미스테리아》에 처음 실렸고 원래는 영화 시나리오로도 썼었다는 작가의 말을 확인한 뒤 필자는 외쳤다.
‘뭐야, 〈구부전〉이 먼저잖아!’
〈구부전〉을 읽고 난 뒤 해당 드라마의 제작기를 열심히 검색해 보았다. 필자의 검색 능력이 부족해서인지 듀나의 이야기가 있었기에 이후의 기획도 가능했다는 고백은 찾을 수 없었다. 이야기의 원천인 창작자와 그의 아이디어에 대한 찬사는 알아보는 사람들이 외쳐야 할 밖에. 그 이야기 이전에 듀나가 있었다, 라고 말이다.
아무튼, 변질된 시아버지의 상태는 19세기 후반 당시 조선의 누구도 제대로 진단할 수 없었으나, 화자는 서양 사람들에게서 명쾌한 용어를 빌려 ‘뱀파이어’라고 묘사한다. 조선의 뱀파이어는 백작이나 군주와도 유사한 계급적 지위를 가졌으니 서양의 개념과 유사할지 모르나, 피와 살을 탐하며 부풀어 오른 배는 좀비를 연상시키고, 자신이 어떻게 변했든 양반으로서 힘을 행사하려 애쓰는 모습은 조선의 꼰대들 그 자체다. 이미 죽은 존재, 한번 죽었으니 사라져야 할 존재, 진즉 죽었는데도 죽은 줄도 모르는 존재, 그래서 죽었음에도 죽지 않는 존재, 바로 조선의 잘난 ‘양반들’이다.
시아버지가 자기 식솔들의 피로 갈증을 채우고 며느리와 자식들도 독을 주입당해 2차 뱀파이어가 된 후, 이 양반들은 허기를 잠재우지 못하고 마을 밖 사람들을 사냥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면역력 덕분에 이들의 먹이가 되지 않았던 화자는 외지 사람을 집 안으로 불러들이며 뱀파이어 일가의 조력자로 일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화자는 남장을 하고 자유롭게 살아간다. 좋아하는 음악을 즐기며 기방에서 노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뿌리 수액 때문인지 완력마저 증강했고, 제법 안전해진 뒤로는 남자들만의 것이었던 온갖 특권도 누린다. 점점 더 능청스럽고 대범해진 화자는 급기야 죄를 즐기며 살육의 공범이 되어간다.
이 와중에도 시아버지는 책상에 앉아 책을 읽는데, 이전에 고수하던 자신의 이론과 정반대의 세계관을 끌어와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한다. 그는 정적들을 먹이로 공급받으면서 뱀파이어 아래 인간을 두는 새로운 계급 체계를 꿈꾸기 시작한다.
시아버지는 나라를 뒤엎어 이상적인 뱀파이어 국가를 만들 생각을 하고, 화자는 시아버지를 통해 조선의 가치와 문화가 세계를 정복할 가능성을 점친다. 이 시점에 지극히 사소하면서도 특출난 화자의 재능이 드러난다. 시아버지와 조선의 운명이 화자의 손에 걸리는 의외의 전개가 펼쳐지는데……. 이야기의 결말이 궁금하다면 제목에서 힌트를 찾아봐도 좋다. 제목 〈구부전〉의 음절을 살펴보면 ‘구(舅)’는 시아버지를 뜻하고, ‘부(婦)’는 여기서는 며느리를 말한다. 이 이야기는 둘 사이에 일어난, 단순히 ‘전해진 이야기(傳)’가 아니다. 둘 사이에 일어난 ‘전쟁(戰)’이다. 더 확실한 결말은 직접 읽어보고 확인할 수 있다.
다 읽고 보니 이 증언을 하는 여성의 얼굴이 복합적으로 그려진다. 그는 20대나 30대로밖에 보이지 않을 앳된 얼굴로 아무도 믿지 못할 이야기를 증언하고 있다. 그는 아마도 영어나 광둥어, 혹은 자신의 모국어가 아닌 것이 확실하나 30년은 현지에 살았을 법한 유창한 제2외국어로 이 이야기를 전했을 것이다. 그는 조선어를 이미 잊었고 이제는 단어조차 잘 떠올리지 못하지만, 자신이 기억하는 조선의 이야기를 상대가 알기 쉬운 맥락에서 전달할 수 있을 정도로 각국의 문화에 조예가 깊다. 이 설정을 알고 읽으면 작가가 화자의 증언을 청취해 번역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화자는 평생에 걸쳐 글과 음악과 그림만큼 자신을 사로잡은 것을 알지 못한다. 그중에서도 어쩌면 당대 가장 유치하고 천하고 저급하다고 여겨지는 것, 그래서 고급스러운 것만을 향유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들을 섭렵하고 통달해 간다. 그리고 이를 흡수해 온 자신의 저력이 야만의 시대를 통과한 순간, 자신을 살게 했음을 안다. 죽어 마땅한 자들이 죽었다 깨어나도 해독하지 못하고 이해하려 하지 않는 것들을 화자만은 알고 있다. 그것이 그의 자부다.
동시에 그 한복판에 있었기에 화자는 공범이자 도피자이기도 하다. 이제는 그 역시 죽지 못하는 삶을 끌어안고 산다. 모두가 거짓말로 여길 이야기를 담담히 전하는, 화자의 복잡다단한 얼굴을 떠올리면 급기야 화자가 듀나 같다는 생각에 이른다. 초월한 자만이 유한한 한때를 말하리니. 그가 자생한 게 경이롭달까. 듀나는 초월한 자 같다. 듀나의 30년 저작을 엿보다 보면 타임머신을 탄 듯한 묘한 기분이 든다.
〈시사IN〉에 실린 인터뷰를 살펴보니, 작가는 현실과 적정한 거리를 두고 작품을 집필한다고 한다. “지금 여기에서 제가 경험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씁니다. 그런데 이렇게 쓰다 보면 제가 그렇게 벗어나려는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게 됩니다.” 그는 “그냥 도피를 위해 써요”라고 말하지만 “이야기하지 않음으로써” 현실을 이야기한다. (김영화 기자, “30년 차 ‘토끼 작가’ 듀나는 말한다, 절망하지 말자고”, 〈시사IN〉, 2024년 3월 8일.) 그의 작품은 독자에게 현실에 충분히 절망하는 게 낫다고 말하는 듯하지만, 한편으로 현실을 관조하며 절망을 유보하도록 한다. 독자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자의 증언처럼 그의 이야기를 받아안게 된다.
먼 미래를 말하듯 듀나의 궤적을 응시하며
본 작품 〈구부전〉이 출간된 것도 어언 20년 전이다. 지금보다 훨씬 절망적인 문화적 폐쇄성과 편협성이 한국 사회를 지배했던 때에 이 작품이 발표되었다는 것이 새삼 놀랍다. 듀나는 얼마만큼의 시간을 뛰어넘으며 이야기에 천착해 왔을까. 내가 기억하기로 20~30년 전 한국은 뱀파이어 시아버지가 자기가 죽은 줄도 모르고 호통치는 조선 시대와 다를 바 없었다. 아니, 차별을 금지하자는 말에 질색하는 사람들이 엄연히 존재하는 지금도 마찬가지고, 여자와 약자, 동물들이 삶을 속수무책으로 빼앗기는 한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다. 삶이 쉽게 비관적 전망으로 기울 때 ‘현실은 이야기가 아니니까’ 하는 체념이 싹튼다. 제약 속에 자신을 구겨 넣고 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포기는 일상이 된다. 푸념과 단념은 내면화된다. 그럴 때 일찌감치 다른 세계를 향해 달려나간 듀나의 작품들은 현재에 발목 잡힌 채 머무르고 있는 우리의 안일함을 비웃는 듯하다.
특히, 답답한 세계를 먼 과거로 밀어버리고 다른 세계를 소환해 쾌감을 선사하려는 한국의 장르 창작자에게 듀나는 영원한 자극이자 지향이 아닐까 싶다.
SF가 매니악한 장르라는 이야기를 들을 일이 없을 정도로 국내 SF가 비약적으로 성장한 요즘, 창작자들은 듀나의 활동의 수혜자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그가 없던 길을 만들었다는 의미 이상이다. 내가 만약 30년 전에 활동했다면 듀나처럼 지속할 수 있었을까? 말은 쉽지만 결단과 시행은 쉽지 않다. 하지만 듀나를 통해 마치 시간 여행으로 미래를 아는 것처럼, 알고 보는 영화의 결말처럼 우리는 다양한 상상력을 향유하고 있다. 아무도 정하지 않았지만, 그가 결단한 길에 우리가 있다.
답 없는 세계를 유령처럼 떠도는 게 비루한 현실인가 싶을 때, 이미 전제에 의문을 던지며 세계를 뒤엎는 실험들이 있어왔다는 것은 갑갑증에 걸린 독자들의 숨통을 다소 터준다. 위계적이고 편협한 전체주의, 협소한 공동체주의가 강고한 한국 사회에 장르적 문법으로 진즉 반기를 든 사람이 있었음에 위로를 받는다.
듀나를 읽고 난 뒤 나와 독자들은 세계를 다른 각도에서 보게 된다. 어쩌면 이미 죽은 사조들이 호통치는 이 현실도 후반부 전복을 위한 훌륭한 빌드업일지 모른다는 가슴 뛰는 상상을 하게 된다. 그저 지금 아둔하게 읽고 노래하는 것이 자신을 지키고 세계를 바꿀 가장 날카로운 무기라 믿어본다. 그것이 동시대 독자들이 듀나에게 받은 선물이다. 듀나의 이야기는 풍화에 낡지 않는 플래티넘 재질처럼 영속해 존재감을 빛낼 테다. 세상이 과연 달라질까, 의심이 드는 순간이야말로 그의 이야기를 곁에 둘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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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모과
단편집 《밤의 얼굴들》, 중편소설 《클락워크 도깨비》 《10초는 영원히》 《노바디 인 더 미러》, 장편소설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 《서브플롯》 《말 없는 자들의 목소리》 《그린 레터(근간)》 등을 출간했다. 2019년 한국과학문학상, 2021년 SF어워드, 2022년 양성평등문화상 신진여성문화인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