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라이 유미코 선생님께.
안녕하세요, 시라이 선생님. 한국에서 SF와 사회파 호러 소설, 그리고 몇몇 만화의 원작을 쓰고 있는 전혜진이라고 합니다. 아직 일본에는 번역서가 나오지 않았지만, 한국의 근현대사 속 국가폭력을 SF와 판타지를 통해 이야기하는 “바늘 끝에 사람이”와, 여성에 대한 SF 단편들을 모은 “아틀란티스 소녀”라는 책을 썼습니다.
사실은 시라이 선생님께 드릴 편지를, 한국 대통령의 탄핵 선고가 난 뒤에 쓰려고 자꾸 미루고 있었습니다. 헌법재판소에서 빨리 대통령을 탄핵하고 혼란을 수습하기를 바라면서 주말마다 거리로 나갔지만, 상황이 수습되려면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이네요. 그래도 시라이 선생님께서 이 편지를 받으실 때 쯤이면, 무려 2024년에 자신과 정치적인 지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시민을 적으로 돌리고, 삼권분립의 원칙을 어기고 국회를 공격하려 했던 대통령의 운명 정도는 결정이 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2024년 12월 3일, 한국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계엄을 선포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국회로 달려갔고, 그 몇 배는 되는 사람들이 현장 라이브를 보며 밤새 잠들지 못했습니다. 국회 상공에서 군인들이 탄 헬기가 내려오는 것을 보며, 불과 한 세대 전 광주에서 벌어졌던 시민 학살을 떠올리며 몸서리쳤지요. 야당 대표 이재명은 죽음을 각오하고 국회로 달려가는 자신의 모습을 유튜브 라이브로 남기며, 시민들에게 국회로 와 달라고 말했습니다. 국회가 겨우 계엄을 막아낸 그 새벽이 지나고, 그 주 주말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국회 앞에 모였습니다. 그 다음 주, 국회가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가결시키던 12월 14일에도요.
탄핵안이 가결되던 날 저는 국회 앞에서, 어느 분이 이케다 리요코의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의 오스칼을 그린 깃발을 들고 나오신 것을 보며 떠올렸습니다. 오스칼이 시민들의 편에 설 것을 선언하며 프랑스 위병대를 향해 “우리들은 조국의 이름 없는 영웅이 되자!”고 외치던 장면을요. 사람들은 같은 만화에서, 생쥐스트가 “조국이 번영하기 위해 루이는 죽어야 한다.”고 말하던 장면이나, 한국 작가인 김혜린의 만화 "테르미도르"의 몇몇 장면을 인용하며, 대통령 탄핵을 루이 16세의 사형에 빗대어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딱 그 시기에 일본에서는 "베르사유의 장미" 애니메이션이 개봉해서, 사람들은 현실의 이야기와 오스칼의 혁명에 대해, 그리고 그와 연관된 만화들에 대해서도 SNS에서 많은 의견들을 주고받았습니다.
좋은 만화는 마치 칼날로 스크린톤을 쌓아올리고 긁어내듯 사람의 마음 속에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들이 하나하나 모여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는 커다란 무늬가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 제게 “어떤 SF 작품의 영향을 받았나요?”라고 물었을 때, 저는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나온 여러 편의 한국 순정만화들, 그 중에서도 SF 만화들의 제목을 이야기하고, 때로는 웃으며 덧붙이곤 합니다. 저는 굳이 한국 SF 계에서 자신의 계보를 설명하자면, ‘순정만화의 아이’라는 말이 어울릴 것이라고요.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1980년대 말 출간된 강경옥의 “별빛속에”나, 본격적인 순정만화잡지의 시대의 역사와 함께 했던 신일숙의 “1999년생”과 김혜린의 “아라크노아”, 소년지에 연재되었던 김진의 “푸른 포에닉스”와 최초의 게임 판타지 SF였던 “러브 메이커” 같은 작품들을 접하지 못했다면, 지금의 저는 지금과는 다른 이야기들을 쓰고 있거나, 어쩌면 작가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이후 내용은 출간 도서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2026 여름 출간 예정)

전혜진 (Heyjin JEON)
전혜진은 수학과 기계공학, 컴퓨터과학을 공부했지만 딱히 전공을 살리진 못했다. 오히려 중고등학교 때 읽었던 한국 순정만화 및 일본만화의 영향을 받아 연습장 만화와 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며, 이후 PC통신과 인터넷을 통해 습작을 발표했다.
2007년 라이트노벨 《월하의 동사무소》로 데뷔한 이래 SF와 스릴러, 만화, 에세이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에서》, 《책에서 나오다》, 《우리의 신호가 닿지 않는 곳으로》, 《2035 SF 미스터리》, 《감겨진 눈 아래에》, 《텅 빈 거품》 등 다양한 SF 앤솔러지에 단편으로 참여하였으며, 단편집 《홍등의 골목》과 《아틀란티스 소녀》, 장편인 《메티스 프로젝트》를 발표하고 SF 순정만화 《리베르떼》의 스토리를 맡았다. 《우리가 다른 귀신을 불러오나니》와 《귀신이 오는 밤》, 《오래된 신들이 섬에 내려오시니》 등의 호러·스릴러 앤솔러지에 참여하고, 미스터리·스릴러인 순정만화 《레이디 디텍티브》의 스토리를 맡았다. 《순정만화에서 SF의 계보를 찾다》를 통해 한국 SF의 한 축이었던 SF 순정만화를 재조명하고, 여성의 임신과 출산, 그에 따른 사회적 압력을 다룬 장편소설 《280일》, 한국의 국가폭력을 다룬 단편을 모은 《바늘 끝에 사람이》를 발표하였으며, 여성의 역사를 다루는 에세이 《여성, 귀신이 되다》, 《우리가 수학을 사랑한 이유》등을 발표했다.
전혜진은 환상문학웹진 거울과 괴이학회 등에서 활동하며 사회문제에 대한 비판의식과 여성이 겪는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다양한 소재로 엮어 SF를 비롯한 여러 장르와, 소설과 만화, 에세이를 아우르며 추구하고 있다. 좌우명은 "성실한 입금 확실한 원고".
작가 홈페이지 : https://jeonheyjin.com/
시라이 유미코 선생님께.
안녕하세요, 시라이 선생님. 한국에서 SF와 사회파 호러 소설, 그리고 몇몇 만화의 원작을 쓰고 있는 전혜진이라고 합니다. 아직 일본에는 번역서가 나오지 않았지만, 한국의 근현대사 속 국가폭력을 SF와 판타지를 통해 이야기하는 “바늘 끝에 사람이”와, 여성에 대한 SF 단편들을 모은 “아틀란티스 소녀”라는 책을 썼습니다.
사실은 시라이 선생님께 드릴 편지를, 한국 대통령의 탄핵 선고가 난 뒤에 쓰려고 자꾸 미루고 있었습니다. 헌법재판소에서 빨리 대통령을 탄핵하고 혼란을 수습하기를 바라면서 주말마다 거리로 나갔지만, 상황이 수습되려면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이네요. 그래도 시라이 선생님께서 이 편지를 받으실 때 쯤이면, 무려 2024년에 자신과 정치적인 지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시민을 적으로 돌리고, 삼권분립의 원칙을 어기고 국회를 공격하려 했던 대통령의 운명 정도는 결정이 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2024년 12월 3일, 한국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계엄을 선포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국회로 달려갔고, 그 몇 배는 되는 사람들이 현장 라이브를 보며 밤새 잠들지 못했습니다. 국회 상공에서 군인들이 탄 헬기가 내려오는 것을 보며, 불과 한 세대 전 광주에서 벌어졌던 시민 학살을 떠올리며 몸서리쳤지요. 야당 대표 이재명은 죽음을 각오하고 국회로 달려가는 자신의 모습을 유튜브 라이브로 남기며, 시민들에게 국회로 와 달라고 말했습니다. 국회가 겨우 계엄을 막아낸 그 새벽이 지나고, 그 주 주말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국회 앞에 모였습니다. 그 다음 주, 국회가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가결시키던 12월 14일에도요.
탄핵안이 가결되던 날 저는 국회 앞에서, 어느 분이 이케다 리요코의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의 오스칼을 그린 깃발을 들고 나오신 것을 보며 떠올렸습니다. 오스칼이 시민들의 편에 설 것을 선언하며 프랑스 위병대를 향해 “우리들은 조국의 이름 없는 영웅이 되자!”고 외치던 장면을요. 사람들은 같은 만화에서, 생쥐스트가 “조국이 번영하기 위해 루이는 죽어야 한다.”고 말하던 장면이나, 한국 작가인 김혜린의 만화 "테르미도르"의 몇몇 장면을 인용하며, 대통령 탄핵을 루이 16세의 사형에 빗대어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딱 그 시기에 일본에서는 "베르사유의 장미" 애니메이션이 개봉해서, 사람들은 현실의 이야기와 오스칼의 혁명에 대해, 그리고 그와 연관된 만화들에 대해서도 SNS에서 많은 의견들을 주고받았습니다.
좋은 만화는 마치 칼날로 스크린톤을 쌓아올리고 긁어내듯 사람의 마음 속에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들이 하나하나 모여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는 커다란 무늬가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 제게 “어떤 SF 작품의 영향을 받았나요?”라고 물었을 때, 저는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나온 여러 편의 한국 순정만화들, 그 중에서도 SF 만화들의 제목을 이야기하고, 때로는 웃으며 덧붙이곤 합니다. 저는 굳이 한국 SF 계에서 자신의 계보를 설명하자면, ‘순정만화의 아이’라는 말이 어울릴 것이라고요.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1980년대 말 출간된 강경옥의 “별빛속에”나, 본격적인 순정만화잡지의 시대의 역사와 함께 했던 신일숙의 “1999년생”과 김혜린의 “아라크노아”, 소년지에 연재되었던 김진의 “푸른 포에닉스”와 최초의 게임 판타지 SF였던 “러브 메이커” 같은 작품들을 접하지 못했다면, 지금의 저는 지금과는 다른 이야기들을 쓰고 있거나, 어쩌면 작가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이후 내용은 출간 도서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2026 여름 출간 예정)
전혜진 (Heyjin JEON)
전혜진은 수학과 기계공학, 컴퓨터과학을 공부했지만 딱히 전공을 살리진 못했다. 오히려 중고등학교 때 읽었던 한국 순정만화 및 일본만화의 영향을 받아 연습장 만화와 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며, 이후 PC통신과 인터넷을 통해 습작을 발표했다.
2007년 라이트노벨 《월하의 동사무소》로 데뷔한 이래 SF와 스릴러, 만화, 에세이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에서》, 《책에서 나오다》, 《우리의 신호가 닿지 않는 곳으로》, 《2035 SF 미스터리》, 《감겨진 눈 아래에》, 《텅 빈 거품》 등 다양한 SF 앤솔러지에 단편으로 참여하였으며, 단편집 《홍등의 골목》과 《아틀란티스 소녀》, 장편인 《메티스 프로젝트》를 발표하고 SF 순정만화 《리베르떼》의 스토리를 맡았다. 《우리가 다른 귀신을 불러오나니》와 《귀신이 오는 밤》, 《오래된 신들이 섬에 내려오시니》 등의 호러·스릴러 앤솔러지에 참여하고, 미스터리·스릴러인 순정만화 《레이디 디텍티브》의 스토리를 맡았다. 《순정만화에서 SF의 계보를 찾다》를 통해 한국 SF의 한 축이었던 SF 순정만화를 재조명하고, 여성의 임신과 출산, 그에 따른 사회적 압력을 다룬 장편소설 《280일》, 한국의 국가폭력을 다룬 단편을 모은 《바늘 끝에 사람이》를 발표하였으며, 여성의 역사를 다루는 에세이 《여성, 귀신이 되다》, 《우리가 수학을 사랑한 이유》등을 발표했다.
전혜진은 환상문학웹진 거울과 괴이학회 등에서 활동하며 사회문제에 대한 비판의식과 여성이 겪는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다양한 소재로 엮어 SF를 비롯한 여러 장르와, 소설과 만화, 에세이를 아우르며 추구하고 있다. 좌우명은 "성실한 입금 확실한 원고".
작가 홈페이지 : https://jeonheyj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