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 《제저벨》이 있다. 책을 집어 들기 전에 우선 술을 한 잔 마신다.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일이지만 이번 경우는 특수하다. 나에게는 잊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와 〈안개 바다〉다. 두 소설은 《제저벨》과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고 《제저벨》의 프리퀄 격에 속한다. 그리고 듀나는 자기 독자들의 충성심을 한 치도 의심하지 않는 모양인지, 두 소설에서 세계관 설명을 끝낸 ‘링커 우주’에 관해 《제저벨》에서는 다시 설명하지 않는다.
아무리 작가가 《제저벨》을 같은 설정을 공유하는 단편을 모아 하나의 장편으로 묶은 ‘픽스업 소설’이라고 주장한다 한들, 전집이 아닌 단행본으로 나온 이상, 세상에는 《제저벨》만 읽는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고 사실 그런 사람은 날이 갈수록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제저벨》에 관해 말할 때 다른 책을 인용하는 것은 뭐랄까, 원작까지 모조리 섭렵한 오타쿠가 영화만 본 라이트 팬에게 훈계하는 것 같은 어색한 느낌이랄까. 모름지기 한 권의 책은 다른 책들과 관계를 맺을지언정 어엿하게 홀로서기를 할 수 있어야 하는 법이다.
이 글의 목표는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와 〈안개 바다〉를 철저히 외면하고 《제저벨》만으로 《제저벨》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의도된 망각과 오독이 가득함을 미리 밝힌다.
*
내가 써놓고 아직 발표하지 않은 작품 중엔 다음 내용의 중편소설이 있다.
드디어 우리는 완전한 인간들을 손에 넣었다. 인간들은 몸에 딱 맞는 차갑고 투명한 실린더 안에 보관되어 있었다. 전뇌에 맴돌이 전류가 흘러 백색소음을 냈다. 인간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하나도 아니고 여럿이라니. 지금까지는 완전히 이론에 불과했던 우리의 연구가 이제는 실증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곧 준비를 마친 박사가 돌아왔다. 그는 전신을 라텍스 소재로 덮어 과거 인간의 수술을 최대한 모방하고자 했다. 박사는 조심스럽게 실린더 온도를 높였다. 일단은 해동한 다음 경과를 보자는 거였다. 그러나 해동된 인간은 진흙처럼 흐물흐물해졌고 눈을 뜨거나 말하는 건 고사하고 똑바로 서지도 못했다. 아무 성과도 없이 인간을 셋이나 잃는 데는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 박사는 다시금 연구실에 틀어박혔다. 우리도 나름대로 손에 책을 쥐고 박사의 연구를 도왔다. 책 속에서 인간은 하늘을 날고, 마법을 쓰며, 순간 이동을 하기도 했다. 우리로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는 메인 플랫폼에 개틀링 기관총이나 미사일을 장착할 수는 있어도 에너지 파를 쏠 수는 없었고, 제트 팩으로 하늘을 날 수는 있어도 망토만 두르고 비행할 순 없었다.
—서윤빈, 《인간 연구》 중 일부
나는 과거와 단절된 미래 세대라면 어떤 형태로든 과거를 연구할 거라고 여겼다. 《인간 연구》는 너무나도 진지한 미래의 로봇들이 옛 인간의 창작물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생기는 문제를 다룬 소설이다.
《제저벨》의 세계는 이와 어느 정도 비슷하면서 결정적으로 다르다. ‘링커 우주’의 문화 양식은 20세기 서구 문명(특히 20세기 할리우드)을 기본으로 한다. 모두가 영화배우 프레드 아스테어를 알고(요즘 애들에게 물어보라. 누가 〈톱 햇〉을 보긴 했을까?), ‘토요일 대륙’에서는 2차 세계 대전을 끊임없이 재현하고 있다. 중심인물 중 하나인 의사 선생의 고향, ‘마리아 부츠’ 사람들은 외부와 교역이 다시 시작될 때까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제인 에어》를 복원하기 위해 수많은 텍스트를 재생산한다. 〈스타 트렉〉 마니아들이 끊임없이 늘어나 거대한 세력이 된다….
이런 정황에서 누군가는 시뮬라크르 개념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맞는 말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크루소’와 ‘링커 우주’는 원본 없는 이미지이자 초현실 그 자체다. 하지만 이 글에서 나는 조금 다른 측면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왜 20세기를 “시뮬라시옹하는가”가 아니라 왜 “20세기를” 시뮬라시옹하는가에 관해서.
듀나는 작품 속에 범람하는 20세기의 향연을 “내 어린 시절 문화 경험의 반영”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제저벨》만 읽은 독자에게는 그런 편향된 문화로 점철된 세계가 ‘크루소’의 특수성으로 읽힌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항성 간 여행이 가능해진 먼 미래로 보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강력한 문화라도 몇 세기 후까지 이렇게 총체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는 없다. 당장 지난 100년 동안 우리 세계가 얼마나 변했는지를 생각해 보라. 임방울 명창의 〈쑥대머리〉가 유성기 앨범으로 불티나게 팔린 때가 1930년대다.
‘크루소’의 역사를 상상해 보자. 그 시작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분명 최초의 주민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할리우드를, 2차 세계 대전을, 《제인 에어》를 공유했다. 여기까지는 말이 된다. 그런데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아무리 보수적으로 봐도 반세기 이상은 흐른 것 같은데) ‘크루소’의 존재들은 어떤 새로운 문화도 형성하지 못했단 말인가? 외양 묘사로 볼 때 그들과 지구 조상 사이의 거리는 현생 인류와 네안데르탈인 사이의 거리보다 몇백 광년은 더 멀 텐데 말이다.
혹독하고 척박한 곳에 떨어진 이민자들에게는 문화생활보다 생존이 우선이었다는 설명도 가능하겠으나, 이는 너무나 간편한 변명이다.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만족스럽지 않은데, 하나는 몇 세대 넘게 정착해서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크루소’에 떨어지는 새 조난자들 역시 20세기 문화에 익숙하다는 점이다. 이는 링커 우주의 20세기 범람이 생각보다 더 뿌리 깊은 구조로 작동한 결과임을 시사한다.
링커 우주에서는 기본적으로 모든 게 자궁에서 태어나는 것 같다. 작은 기계들을 비롯해 거대한 항공모함, 우주선 발사장(‘올리비에’)과 우주선(‘아자니’)까지도 다 자궁에서 나온다. 생명체들이 자궁에서 태어남은 말할 것도 없다. 하여 처음에 링커 우주는 마치 〈아바타〉의 판도라 행성처럼 기계가 아니라 생명체들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문명 구조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빨판상어라고 묘사되던 아자니와 게임 ‘스타크래프트’ 속 저그의 해처리 같은 인상을 주던 올리비에 역시 나중에는 기계임이 밝혀진다. 또한, 링커 우주는 유전자가 극도로 불안정한 곳으로 대부분의 생명체가 몇 세대만 지나면 번식 능력을 잃는다. 자신과 닮은 자손을 남기는 생식 기능은 생명체의 핵심적인 특성으로, 이 기능이 결여된 생명체는 충분히 발전한 로봇과 구별되지 않는다. 결국, 자궁이 모든 것을 생산하는 생명체 기반의 우주처럼 보였던 《제저벨》의 세계는 실은 기계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을 뿐이다.
기계들로 가득한 우주라는 점이 왜 중요한가?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이 글에서는 세대 문제를 짚고자 한다. 앞서 자신과 닮은 자손을 남기는 생식 기능을 생명체의 핵심 특성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중요한 건 자손을 남기는 것보다도 ‘닮은’ 자손을 남긴다는 데 있다.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부모와 ‘닮은’ 자손은 성장 과정에서 부모를 모방하면서 동시에 부모와 같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동질성에 대한 욕구와 차별성에 대한 욕구가 경합하면서 지적 생명체는 세대가 지날수록 조금씩 다른 문화를 형성한다. 한편, 기계의 자손은 윗세대와 완전히 같을 수도 완전히 다를 수도 있다. 그들에게 생명체와 똑같은 세대 문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 작가는 기계의 세대 문화에 완전히 다른 개별자들만 존재하게 될 거라고 결론지은 듯 보인다. 실제로 이 제저벨에 동료와 조직은 수없이 등장하지만, 가족 단위의 인물들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서로 닮지 않고 극단적인 차이만 존재하는 《제저벨》의 우주에서 생명체들은 오직 동질성에 대한 욕망만 가졌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의 중심이 될 수 있는가? 모두가 천태만상으로 다르기에 중심은 내부에서 발견될 수 없다. 20세기 문화가 소환되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마치 삼각형의 외심처럼 ‘링커 우주’의 개별자들은 그 누구와도 닮지 않은 가상의 중심을 그들 밖에서 발견한다. 그들은 그 중심이 형성한 외접원 안에 들어 있기는 하나, 누구도 그 중심과 닮은 세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단절되어 있다. 그 문화는 개별자들의 것이 아니므로 개별자들은 언제나 각자의 목숨과 함께 사라질 몽상만을 가질 뿐이다. 바깥에 있는 20세기의 범람을 결코 바꾸지 못하는 채로.
덧붙여:
하필이면 20세기가 범람한다는 점에서 누군가는 한동안 한국인들이 열병처럼 앓았던 ‘두 유 노 클럽’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을지도 모른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외국인만 보면 싸이와 김연아를 아느냐고, 김치를 아느냐고 묻던 방송인들이 심심찮게 보였다. ‘두 유 노(Do you know)’는 소위 선진국에서 온 사람들에게만 ‘시전’되었다는 점에서 그 뒤에 숨은 욕망이 아주 쉽게 읽힌다. 당시 한국은 주류 중의 주류, 그러니까 미국 같은 선진국 문화에 ‘끼고’ 싶어 했다(물론 지금이라고 많이 다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제저벨》 속 인물들은 주류 세계 문화 혹은 미국 문화에 인정받고자 하는 비미국인의 콤플렉스를 앓고 있다고도 볼 수 있고, 이는 듀나 자신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지점이다. (* 같은 책, 310쪽. 개정판에 붙인 작가의 말에서 듀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제저벨》은 서구인과 서구세계를 흉내 내는 비서구인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런 특질로 말미암아 앞선 논의를 미국 중심주의의 연장선으로 축소하는 것은 부당하다. 왜냐하면 소설 속 가상의 중심은 우연적으로 형성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제저벨》 세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문화 권력의 중심성이 아니라 부재성이다. 가상의 중심이 어디든 그로 인해 수혜를 입는 이들이 거의 없다는 점만 봐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인물들은 모두 내셔널리티를 상실하고 있으므로, 가상의 중심이 한국이고 그래서 미국 배우 프레드 아스테어가 아니라 임꺽정을 닮은 인물이 주인공이었다고 하더라도 이 소설은 전혀 다를 것이 없었으리라.
서윤빈
2022년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부문에 〈루나〉로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날개 절제술》 《파도가 닿는 미래》, 장편소설 《영원한 저녁의 연인들》이 있다.
눈앞에 《제저벨》이 있다. 책을 집어 들기 전에 우선 술을 한 잔 마신다.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일이지만 이번 경우는 특수하다. 나에게는 잊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와 〈안개 바다〉다. 두 소설은 《제저벨》과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고 《제저벨》의 프리퀄 격에 속한다. 그리고 듀나는 자기 독자들의 충성심을 한 치도 의심하지 않는 모양인지, 두 소설에서 세계관 설명을 끝낸 ‘링커 우주’에 관해 《제저벨》에서는 다시 설명하지 않는다.
아무리 작가가 《제저벨》을 같은 설정을 공유하는 단편을 모아 하나의 장편으로 묶은 ‘픽스업 소설’이라고 주장한다 한들, 전집이 아닌 단행본으로 나온 이상, 세상에는 《제저벨》만 읽는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고 사실 그런 사람은 날이 갈수록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제저벨》에 관해 말할 때 다른 책을 인용하는 것은 뭐랄까, 원작까지 모조리 섭렵한 오타쿠가 영화만 본 라이트 팬에게 훈계하는 것 같은 어색한 느낌이랄까. 모름지기 한 권의 책은 다른 책들과 관계를 맺을지언정 어엿하게 홀로서기를 할 수 있어야 하는 법이다.
이 글의 목표는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와 〈안개 바다〉를 철저히 외면하고 《제저벨》만으로 《제저벨》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의도된 망각과 오독이 가득함을 미리 밝힌다.
*
내가 써놓고 아직 발표하지 않은 작품 중엔 다음 내용의 중편소설이 있다.
드디어 우리는 완전한 인간들을 손에 넣었다. 인간들은 몸에 딱 맞는 차갑고 투명한 실린더 안에 보관되어 있었다. 전뇌에 맴돌이 전류가 흘러 백색소음을 냈다. 인간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하나도 아니고 여럿이라니. 지금까지는 완전히 이론에 불과했던 우리의 연구가 이제는 실증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곧 준비를 마친 박사가 돌아왔다. 그는 전신을 라텍스 소재로 덮어 과거 인간의 수술을 최대한 모방하고자 했다. 박사는 조심스럽게 실린더 온도를 높였다. 일단은 해동한 다음 경과를 보자는 거였다. 그러나 해동된 인간은 진흙처럼 흐물흐물해졌고 눈을 뜨거나 말하는 건 고사하고 똑바로 서지도 못했다. 아무 성과도 없이 인간을 셋이나 잃는 데는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 박사는 다시금 연구실에 틀어박혔다. 우리도 나름대로 손에 책을 쥐고 박사의 연구를 도왔다. 책 속에서 인간은 하늘을 날고, 마법을 쓰며, 순간 이동을 하기도 했다. 우리로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는 메인 플랫폼에 개틀링 기관총이나 미사일을 장착할 수는 있어도 에너지 파를 쏠 수는 없었고, 제트 팩으로 하늘을 날 수는 있어도 망토만 두르고 비행할 순 없었다.
—서윤빈, 《인간 연구》 중 일부
나는 과거와 단절된 미래 세대라면 어떤 형태로든 과거를 연구할 거라고 여겼다. 《인간 연구》는 너무나도 진지한 미래의 로봇들이 옛 인간의 창작물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생기는 문제를 다룬 소설이다.
《제저벨》의 세계는 이와 어느 정도 비슷하면서 결정적으로 다르다. ‘링커 우주’의 문화 양식은 20세기 서구 문명(특히 20세기 할리우드)을 기본으로 한다. 모두가 영화배우 프레드 아스테어를 알고(요즘 애들에게 물어보라. 누가 〈톱 햇〉을 보긴 했을까?), ‘토요일 대륙’에서는 2차 세계 대전을 끊임없이 재현하고 있다. 중심인물 중 하나인 의사 선생의 고향, ‘마리아 부츠’ 사람들은 외부와 교역이 다시 시작될 때까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제인 에어》를 복원하기 위해 수많은 텍스트를 재생산한다. 〈스타 트렉〉 마니아들이 끊임없이 늘어나 거대한 세력이 된다….
이런 정황에서 누군가는 시뮬라크르 개념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맞는 말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크루소’와 ‘링커 우주’는 원본 없는 이미지이자 초현실 그 자체다. 하지만 이 글에서 나는 조금 다른 측면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왜 20세기를 “시뮬라시옹하는가”가 아니라 왜 “20세기를” 시뮬라시옹하는가에 관해서.
듀나는 작품 속에 범람하는 20세기의 향연을 “내 어린 시절 문화 경험의 반영”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제저벨》만 읽은 독자에게는 그런 편향된 문화로 점철된 세계가 ‘크루소’의 특수성으로 읽힌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항성 간 여행이 가능해진 먼 미래로 보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강력한 문화라도 몇 세기 후까지 이렇게 총체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는 없다. 당장 지난 100년 동안 우리 세계가 얼마나 변했는지를 생각해 보라. 임방울 명창의 〈쑥대머리〉가 유성기 앨범으로 불티나게 팔린 때가 1930년대다.
‘크루소’의 역사를 상상해 보자. 그 시작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분명 최초의 주민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할리우드를, 2차 세계 대전을, 《제인 에어》를 공유했다. 여기까지는 말이 된다. 그런데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아무리 보수적으로 봐도 반세기 이상은 흐른 것 같은데) ‘크루소’의 존재들은 어떤 새로운 문화도 형성하지 못했단 말인가? 외양 묘사로 볼 때 그들과 지구 조상 사이의 거리는 현생 인류와 네안데르탈인 사이의 거리보다 몇백 광년은 더 멀 텐데 말이다.
혹독하고 척박한 곳에 떨어진 이민자들에게는 문화생활보다 생존이 우선이었다는 설명도 가능하겠으나, 이는 너무나 간편한 변명이다.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만족스럽지 않은데, 하나는 몇 세대 넘게 정착해서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크루소’에 떨어지는 새 조난자들 역시 20세기 문화에 익숙하다는 점이다. 이는 링커 우주의 20세기 범람이 생각보다 더 뿌리 깊은 구조로 작동한 결과임을 시사한다.
링커 우주에서는 기본적으로 모든 게 자궁에서 태어나는 것 같다. 작은 기계들을 비롯해 거대한 항공모함, 우주선 발사장(‘올리비에’)과 우주선(‘아자니’)까지도 다 자궁에서 나온다. 생명체들이 자궁에서 태어남은 말할 것도 없다. 하여 처음에 링커 우주는 마치 〈아바타〉의 판도라 행성처럼 기계가 아니라 생명체들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문명 구조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빨판상어라고 묘사되던 아자니와 게임 ‘스타크래프트’ 속 저그의 해처리 같은 인상을 주던 올리비에 역시 나중에는 기계임이 밝혀진다. 또한, 링커 우주는 유전자가 극도로 불안정한 곳으로 대부분의 생명체가 몇 세대만 지나면 번식 능력을 잃는다. 자신과 닮은 자손을 남기는 생식 기능은 생명체의 핵심적인 특성으로, 이 기능이 결여된 생명체는 충분히 발전한 로봇과 구별되지 않는다. 결국, 자궁이 모든 것을 생산하는 생명체 기반의 우주처럼 보였던 《제저벨》의 세계는 실은 기계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을 뿐이다.
기계들로 가득한 우주라는 점이 왜 중요한가?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이 글에서는 세대 문제를 짚고자 한다. 앞서 자신과 닮은 자손을 남기는 생식 기능을 생명체의 핵심 특성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중요한 건 자손을 남기는 것보다도 ‘닮은’ 자손을 남긴다는 데 있다.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부모와 ‘닮은’ 자손은 성장 과정에서 부모를 모방하면서 동시에 부모와 같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동질성에 대한 욕구와 차별성에 대한 욕구가 경합하면서 지적 생명체는 세대가 지날수록 조금씩 다른 문화를 형성한다. 한편, 기계의 자손은 윗세대와 완전히 같을 수도 완전히 다를 수도 있다. 그들에게 생명체와 똑같은 세대 문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 작가는 기계의 세대 문화에 완전히 다른 개별자들만 존재하게 될 거라고 결론지은 듯 보인다. 실제로 이 제저벨에 동료와 조직은 수없이 등장하지만, 가족 단위의 인물들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서로 닮지 않고 극단적인 차이만 존재하는 《제저벨》의 우주에서 생명체들은 오직 동질성에 대한 욕망만 가졌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의 중심이 될 수 있는가? 모두가 천태만상으로 다르기에 중심은 내부에서 발견될 수 없다. 20세기 문화가 소환되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마치 삼각형의 외심처럼 ‘링커 우주’의 개별자들은 그 누구와도 닮지 않은 가상의 중심을 그들 밖에서 발견한다. 그들은 그 중심이 형성한 외접원 안에 들어 있기는 하나, 누구도 그 중심과 닮은 세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단절되어 있다. 그 문화는 개별자들의 것이 아니므로 개별자들은 언제나 각자의 목숨과 함께 사라질 몽상만을 가질 뿐이다. 바깥에 있는 20세기의 범람을 결코 바꾸지 못하는 채로.
덧붙여:
하필이면 20세기가 범람한다는 점에서 누군가는 한동안 한국인들이 열병처럼 앓았던 ‘두 유 노 클럽’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을지도 모른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외국인만 보면 싸이와 김연아를 아느냐고, 김치를 아느냐고 묻던 방송인들이 심심찮게 보였다. ‘두 유 노(Do you know)’는 소위 선진국에서 온 사람들에게만 ‘시전’되었다는 점에서 그 뒤에 숨은 욕망이 아주 쉽게 읽힌다. 당시 한국은 주류 중의 주류, 그러니까 미국 같은 선진국 문화에 ‘끼고’ 싶어 했다(물론 지금이라고 많이 다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제저벨》 속 인물들은 주류 세계 문화 혹은 미국 문화에 인정받고자 하는 비미국인의 콤플렉스를 앓고 있다고도 볼 수 있고, 이는 듀나 자신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지점이다. (* 같은 책, 310쪽. 개정판에 붙인 작가의 말에서 듀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제저벨》은 서구인과 서구세계를 흉내 내는 비서구인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런 특질로 말미암아 앞선 논의를 미국 중심주의의 연장선으로 축소하는 것은 부당하다. 왜냐하면 소설 속 가상의 중심은 우연적으로 형성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제저벨》 세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문화 권력의 중심성이 아니라 부재성이다. 가상의 중심이 어디든 그로 인해 수혜를 입는 이들이 거의 없다는 점만 봐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인물들은 모두 내셔널리티를 상실하고 있으므로, 가상의 중심이 한국이고 그래서 미국 배우 프레드 아스테어가 아니라 임꺽정을 닮은 인물이 주인공이었다고 하더라도 이 소설은 전혀 다를 것이 없었으리라.
서윤빈
2022년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부문에 〈루나〉로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날개 절제술》 《파도가 닿는 미래》, 장편소설 《영원한 저녁의 연인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