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선 ‘별빛호’가 지구를 벗어나 타이탄으로 훌쩍 떠나는 장편소설 《민트의 세계》(2018)의 인상적인 결말에서, 듀나는 주인공들의 동승자로 작은 동물 무리와 20세기 초 미국 여배우의 이름을 딴 인공지능 자매를 고른다. 이들이 자유로이 비상하는 동안 “진흙으로 대충 빚어 만든 것 같은 축 처진 얼굴”을 지닌 한 못생긴 남자의 육체와 정신은 흔적도 없이 녹아 우주선에 집어삼켜지지만, 이에 반대하거나 슬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말하자면 ‘듀나의 방주’라고 부를 만한 이 장면은 듀나가 작가로서 무엇을 가치 있다고 여기는지를 가장 뚜렷하게 보여준다. 아름답고 비범한 아이들, 동물, 그리고 흑백영화 시대 여배우의 유산. 나머지는 일고의 동정도 없이 땅바닥에 내팽개칠 뿐이다.
짜릿한 해방감이 느껴질 만큼 가차 없는 기준임은 틀림없지만, 가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가르는 모든 행위가 그렇듯 듀나의 이 판단에도 얼마간의 섬뜩함이 서려 있다. 아무튼 우리 모두가 영화배우 ‘릴리언 기시’처럼 될 수는 없으니까. 아름답지 않은 사람, 방주 바깥에 남겨진 사람도 어떻게든 계속 살아야 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런 삶에 과연 어떠한 가치가 있을까? 듀나가 우리를 위해 방주 바깥에 남겨둔 가치는 과연 무엇일까? 아니, 그런 게 있기는 할까?
어쩌면 그 대답은 단편집 《태평양 횡단 특급》(2002) 전반부에 실린 보석 같은 두 작품, 〈첼로〉와 〈기생〉에 이미 제시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듀나의 소설 중 가장 섬뜩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이 두 단편에서 인간들은 현대 자본주의사회가 모든 구성원에게 부여하는 정체성, 즉 소비자로서의 가치를 바탕으로 자신의 존재 의의를 찾으려 한다. 아름다운 로봇 ‘트린’에게 사랑과 소유욕이 뒤섞인 열망을 느낀 〈첼로〉의 ‘이모’는 ‘트린’을 돌보고 꾸미는 데 돈을 아낌없이 쓴다. 한편, 인류가 완전히 자동화된 도시의 생산물을 처리하는 부품으로 전락한 〈기생〉의 세계에서 등장인물들은 제각기 시스템을 회피하거나 거부하며 다시 소비의 주체가 되고자 발버둥을 친다.
문제는 소비자 정체성이란 것이 실은 체제가 꾸며낸 허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현실에서와 마찬가지로 듀나의 두 단편에서 소비자들은 그 무엇도, 심지어는 본인의 소비 활동조차 온전히 주도하지 못한다. 〈첼로〉에서 ‘트린’과 자신이 로봇 3원칙에 따라 쾌락을 거래해 왔다고 믿었던 ‘이모’는 그 거래가 ‘트린’에게 극히 보잘것없었다는 사실 앞에서 무너진다. 한편 〈기생〉에서는 기계가 소비자 역할마저 대체하기 시작하며 도시의 인류가 차례차례 처분당하고, 자본주의 원칙에 입각한 혁명은 허무한 실패로 막을 내린다. 이리하여 《민트의 세계》에서 그랬듯 이 두 작품에서도 인간이 지녔던 정체성은 더 아름답고, 치밀하고, 합리적인 문명의 산물 속으로 녹아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이번에는 녹아내린 잔해에 남아 반짝이는 것이 있다. 〈첼로〉의 결말에서 ‘이모’는 결국 ‘트린’에게 되돌아가고, 〈기생〉의 화자는 인공지능이 쏟아내는 창작물과 아름답게 춤추는 기계 도시를 감상하는 위치에 만족한다. 이것은 이제 소비 활동이 아니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아름다움을 찾아내 감상하며 경탄할 뿐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두 작품 속에서 인간에게 마지막으로 남겨진 가치는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존재로서의 가치’인 셈이다. 설령 우리가 아름다움의 생산자도 소비자도 될 수 없다 하더라도, 감상자로서의 우리는 언제나 존재할 것이므로.
이처럼 한낱 감상자로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일이 비참한 말로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굳이 〈히즈 올 댓〉을 예시로 들 필요도 없이, 듀나는 한국인이 전 세계의 문화콘텐츠를 지금처럼 자유롭게 소비할 수 없었던 시대의 유산에 대한 향수를 즐겨 말해온 작가니까. 이는 자신이 볼 것을 상정하고 만들어지지 않은 작품을 애써 엿보면서, 우연히 손에 넣은 조각 하나하나에서 예기치 못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의 가치를 듀나가 결코 낮게 평가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 우리가 ‘릴리언 기시’는 아닐지언정 최소한 좋은 감상자일 수 있다면, 듀나의 방주에서 관객석 정도는 차지할 수 있지 않을까? 설령 그러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방주 밖에서 유의미하게 살아갈 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를 조금도 거들떠보지 않는 아름다운 존재들을 바라보고 꿈꾸면서, 때로는 어설프게 직접 만들어보기도 하면서.
-
이산화
SF 작가. 2018년 및 2020년 SF어워드 중·단편소설 부문, 2023년 SF어워드 장편소설 부문에서 각각 우수상을 수상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사이버펑크 장편소설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어반 판타지 연작소설집 《기이현상청 사건일지》, SF 단편집 《증명된 사실》 등이 있다. 생물학적 경계와 낯선 디저트에 도전해 보는 것을 좋아한다.
우주선 ‘별빛호’가 지구를 벗어나 타이탄으로 훌쩍 떠나는 장편소설 《민트의 세계》(2018)의 인상적인 결말에서, 듀나는 주인공들의 동승자로 작은 동물 무리와 20세기 초 미국 여배우의 이름을 딴 인공지능 자매를 고른다. 이들이 자유로이 비상하는 동안 “진흙으로 대충 빚어 만든 것 같은 축 처진 얼굴”을 지닌 한 못생긴 남자의 육체와 정신은 흔적도 없이 녹아 우주선에 집어삼켜지지만, 이에 반대하거나 슬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말하자면 ‘듀나의 방주’라고 부를 만한 이 장면은 듀나가 작가로서 무엇을 가치 있다고 여기는지를 가장 뚜렷하게 보여준다. 아름답고 비범한 아이들, 동물, 그리고 흑백영화 시대 여배우의 유산. 나머지는 일고의 동정도 없이 땅바닥에 내팽개칠 뿐이다.
짜릿한 해방감이 느껴질 만큼 가차 없는 기준임은 틀림없지만, 가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가르는 모든 행위가 그렇듯 듀나의 이 판단에도 얼마간의 섬뜩함이 서려 있다. 아무튼 우리 모두가 영화배우 ‘릴리언 기시’처럼 될 수는 없으니까. 아름답지 않은 사람, 방주 바깥에 남겨진 사람도 어떻게든 계속 살아야 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런 삶에 과연 어떠한 가치가 있을까? 듀나가 우리를 위해 방주 바깥에 남겨둔 가치는 과연 무엇일까? 아니, 그런 게 있기는 할까?
어쩌면 그 대답은 단편집 《태평양 횡단 특급》(2002) 전반부에 실린 보석 같은 두 작품, 〈첼로〉와 〈기생〉에 이미 제시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듀나의 소설 중 가장 섬뜩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이 두 단편에서 인간들은 현대 자본주의사회가 모든 구성원에게 부여하는 정체성, 즉 소비자로서의 가치를 바탕으로 자신의 존재 의의를 찾으려 한다. 아름다운 로봇 ‘트린’에게 사랑과 소유욕이 뒤섞인 열망을 느낀 〈첼로〉의 ‘이모’는 ‘트린’을 돌보고 꾸미는 데 돈을 아낌없이 쓴다. 한편, 인류가 완전히 자동화된 도시의 생산물을 처리하는 부품으로 전락한 〈기생〉의 세계에서 등장인물들은 제각기 시스템을 회피하거나 거부하며 다시 소비의 주체가 되고자 발버둥을 친다.
문제는 소비자 정체성이란 것이 실은 체제가 꾸며낸 허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현실에서와 마찬가지로 듀나의 두 단편에서 소비자들은 그 무엇도, 심지어는 본인의 소비 활동조차 온전히 주도하지 못한다. 〈첼로〉에서 ‘트린’과 자신이 로봇 3원칙에 따라 쾌락을 거래해 왔다고 믿었던 ‘이모’는 그 거래가 ‘트린’에게 극히 보잘것없었다는 사실 앞에서 무너진다. 한편 〈기생〉에서는 기계가 소비자 역할마저 대체하기 시작하며 도시의 인류가 차례차례 처분당하고, 자본주의 원칙에 입각한 혁명은 허무한 실패로 막을 내린다. 이리하여 《민트의 세계》에서 그랬듯 이 두 작품에서도 인간이 지녔던 정체성은 더 아름답고, 치밀하고, 합리적인 문명의 산물 속으로 녹아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이번에는 녹아내린 잔해에 남아 반짝이는 것이 있다. 〈첼로〉의 결말에서 ‘이모’는 결국 ‘트린’에게 되돌아가고, 〈기생〉의 화자는 인공지능이 쏟아내는 창작물과 아름답게 춤추는 기계 도시를 감상하는 위치에 만족한다. 이것은 이제 소비 활동이 아니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아름다움을 찾아내 감상하며 경탄할 뿐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두 작품 속에서 인간에게 마지막으로 남겨진 가치는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존재로서의 가치’인 셈이다. 설령 우리가 아름다움의 생산자도 소비자도 될 수 없다 하더라도, 감상자로서의 우리는 언제나 존재할 것이므로.
이처럼 한낱 감상자로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일이 비참한 말로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굳이 〈히즈 올 댓〉을 예시로 들 필요도 없이, 듀나는 한국인이 전 세계의 문화콘텐츠를 지금처럼 자유롭게 소비할 수 없었던 시대의 유산에 대한 향수를 즐겨 말해온 작가니까. 이는 자신이 볼 것을 상정하고 만들어지지 않은 작품을 애써 엿보면서, 우연히 손에 넣은 조각 하나하나에서 예기치 못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의 가치를 듀나가 결코 낮게 평가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 우리가 ‘릴리언 기시’는 아닐지언정 최소한 좋은 감상자일 수 있다면, 듀나의 방주에서 관객석 정도는 차지할 수 있지 않을까? 설령 그러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방주 밖에서 유의미하게 살아갈 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를 조금도 거들떠보지 않는 아름다운 존재들을 바라보고 꿈꾸면서, 때로는 어설프게 직접 만들어보기도 하면서.
-
이산화
SF 작가. 2018년 및 2020년 SF어워드 중·단편소설 부문, 2023년 SF어워드 장편소설 부문에서 각각 우수상을 수상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사이버펑크 장편소설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어반 판타지 연작소설집 《기이현상청 사건일지》, SF 단편집 《증명된 사실》 등이 있다. 생물학적 경계와 낯선 디저트에 도전해 보는 것을 좋아한다.